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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2024-03-28 10:4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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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지키는 막내, “평생 농사꾼으로 살겠다”
농업의 가치는 경제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 “농사꾼이 장사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

▲ ●대호지면 송전리 출생 ●송전초, 당진중 대호지분교 졸업 ●호서고 22회 졸업 ●신구대학 축산과 졸업 ●방송통신대학 농학과 졸업 ●공주대학교 일반대학원 식물자원학과 수료 ●4-H 군회장 역임 ●농업경영인회 회원 ●당진지역사회연구소 연구위원 ●흙사랑농장 대표 ●벼, 감자 등 복합영농 10년차
 

▶편집자주… 당진군은 농업웅군이자 축산웅군이다. 경지면적 전국 2위, 쌀생산량 전국 1위이며 한우와 양돈, 양계 등 축산업 또한 전국에서 최상위권의 사육규모를 보이고 있다. 쌀·쇠고기 수입 개방, 조사료가격 상승, 잇단 산업단지 개발로 인한 농지 수용 등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농축산업에 종사하며 인류에 꼭 필요한 식량 생산에 힘쓰고 있는 농민들을 만나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었다. 당진에서 씨를 뿌리고 가축을 돌보며 살고 있는 우수농가, 귀농인, 젊은 농업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고민과 농촌 현실 그리고 미래 농업의 비전과 의미를 조명하고자 기획보도를 마련했다.


※ 본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이뤄졌습니다.


“농업인은 안전하고 질 좋은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농사꾼이 농작물을 어떻게 홍보하고 얼마에 누구에게 팔아야 할지까지 고민하다보면 자칫 농사꾼이 장사꾼이 될 수 있습니다.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사꾼은 오로지 농사꾼, 그 자체로 남아야 합니다.”

그는 거듭 농사꾼은 그저 농사꾼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농업인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유통과 판매의 몫이 자칫 ‘수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장사치’의 부작용을 낳을까 그는 걱정이다. 씨앗을 뿌리고 자연에 순응하며 땀 흘려 농작물을 가꾸어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농사꾼, 그 진정성이 흐트러지는 것 같아 그는 안타깝다.


스물넷 청년, 고향 흙으로 돌아오다 

10년 전, 정재일(33) 씨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처럼 농사꾼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학창시절 대부분이 그러하듯 가슴에 품은 꿈은 쉽게 실천으로 옮겨지지 못하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갑자기 고향에 내려 가 농사를 짓겠다는 그의 말에 교수도, 친구와 선후배들도 모두 놀라더라고. 하지만 정씨에게 그 결심은 갑작스러울 것 없는 오래 된 꿈이었다.

“고등학교 때 문득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별히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닌데... 아마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평생 당당하고 꿋꿋하게 농사를 지으시면서 우리 5남매를 키우시는 부모님의 모습이 무의식중에 내 안에 심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그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늘 후회 없는 삶을 묵묵히 살아가시는 분이었다. 뿌린 대로 거두고 땀 흘린 만큼 결실을 맺으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고 싶었다. 처음에는 아버지 아래에서 농사를 거들었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수확의 기쁨을 맛보며 아버지에게 농사를 배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는 차츰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 그의 의견을 묻기 시작하셨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농사일의 전반을 그가 끌고 가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뒤에서 힘을 보태주셨다고.


공부하는 젊은 농사꾼

고향에 내려온 지 첫 해 어느 날, 그는 주문받은 배추를 가져다주러 이른 새벽 서울에 올라갔다. 새벽 2시경 서울 번화가는 화려한 네인 속을 배회하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그 가운데 분주히 배추를 나르는 정씨. 그의 눈에 밤거리를 신나게 누비는 또래들과 자신의 손에 들려진 배추 포기가 엇갈렸다. 그의 나이 스물 넷이었다. 한창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친구들과 어울릴 나이에 시골에 내려와 농사만 지으며 산다는 건 그에게도 늘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첫해는 오로지 논과 밭, 집만을 오갔죠. 그러다 문득 젊은데 이렇게 일만하면서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때마침 방송통신대학에서 학생회 오리엔테이션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참석했죠. 방송통신대학에서 농학을 공부하면서 학생회 일도 함께 했어요.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공부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얻은 게 참 많아요.”

그는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한 뒤에 공주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농사꾼이라면 아직도 못 배우고 할 일 없어 농사나 짓는다고 생각하는 편견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싶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공부했다고 그는 말했다.


농업은 국가의 기반,

기반이 흔들리면 모두 무너진다

한참 수확기를 맞은 요즘, 황금물결을 이루는 벼들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무겁다. 농자재, 비료, 농기계 무엇 하나 예년에 비해 3~4배 오르지 않은 것이 없는데 쌀 가격은 제자리걸음이기 때문이다. 한 숨을 내쉬며 답답한 현실을 토로하던 그의 이야기는 어느덧 현 정부의 농업정책에 이르렀다.

“농업은 경제이론에 맞춰 수요와 공급의 원리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농산물은 공산품과 같은 생산물 이상의 가치를 지닙니다. 먹거리는 사람을 먹여 살리는 일 뿐 아니라 마음의 안정을 주는 역할까지 하죠. 당장 집안에 컴퓨터가 없어도 살지만 쌀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불안해 지기 마련이거든요. 투자한 만큼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수학적인 계산으로 농업의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식량자원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는 현실에서 정부의 농업에 대한 정책은 시대를 역행하는 어느 나라에도 없는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산, 중국산 쌀 가격이 언제까지 저렴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했다. 40여 년 전 미국의 밀가루 원조로 인해 국내에 밀 농업이 자취를 감춘 사례를 들며 “식습관을 바꾸는 것은 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말했다. 현재 연간 밀가루 소비량 180톤에 달하는 반면 밀 자급률은 0.2%다.

“농업은 국가의 기반입니다. 기반이 무너지면 전체가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그는 몇 해 전 대호지면 농협 조합원 1300명 중 6,70대가 절반을 차지하고 20대는 자신 혼자였던 것을 떠올렸다. 농촌에 젊은 일꾼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앞으로 농업의 미래가 암담하다고 그는 걱정했다. 정씨는 농민이 올바른 먹거리를 생산하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정부의 정책이 바른 길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봄날 농부가 작은 볍씨 하나를 땅에 심는다. 손톱보다 작은 씨앗에서 이내 파란 싹이 튼다. 모진 장마를 이기고 농부의 알뜰한 손길과 구슬땀으로 벼는 무럭무럭 자란다. 그리고 가을이 오면 온 들판이 황금물결을 이룬다.

정씨는 작은 볍씨 하나가 또 다른 수많은 볍씨들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매번 신기하다.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절대적인 먹거리를 생산하는 자신의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를 새삼 느낀다. 그는 평생 농사꾼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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