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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만난 사람-심훈선생의 막내아들 심재호씨] “이 시대의 화두에 대한 고민, 그것이 ‘상록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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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선생 유품은 상록수의 고향, 당진 품으로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저항시인인 심훈(1901~1936) 선생의 셋째아들 심재호(73, 재미교포)씨. 지난주 열린 제32회 상록문화제에 초청된 그를 햇살이 따스한 가을 오후, 필경사에서 만났다. 그는 필경사 주변을 거닐며 어릴 적 기억을 고스란히 펼쳐놓았다.
“저만치에 목백일홍이 한 그루 있었고, 여기가 모두 꽃동산이었어요. 여기서 뛰어 놀았었지...”
필경사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1975년 아버지 심훈선생이 근무하던 동아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워싱턴에서 재미한인신문 ‘일간뉴욕’을 발행하면서 수십차례 북한을 오가며 이산가족 찾기운동을 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40여년의 언론인 생활에서 은퇴해 50년간 모아 온 아버지 심훈선생의 유품을 돌보고 있다.

 

미국의 ‘심훈기념관’, 고향 당진으로 돌아온다

이틀간 늦은 시각까지 상록문화제를 지켜본 심재호 씨는 “많은 지역민들이 동원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참여해 노래하고 즐기고 먹으며 축제를 연다는 것이 참 중요한 의미”라며 “32년간 상록수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것에 감사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고 말했다. 더불어 “내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 친필원고들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내가 해야 할 의무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심재호씨는 50여 년간 모은 아버지의 친필원고와 유품 1천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그 중에는 심훈선생의 발표된 최초의 글 ‘감옥에서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원본과 극복 ‘그날이 오면’의 일제 총독부 검열본, 영화 ‘먼동이 틀 때’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워싱턴 집에는 ‘심훈기념관’이라는 명패가 걸려있다.
심씨는 당진에서 머문 3일간 민종기 군수를 비롯해 당진군청 문화체육과 관계자들을 만나 심훈문학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 자리에서 민 군수는 심훈문학관 건립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공식의사를 표명했고 이에 심 씨는 문학관에 자신이 모은 심훈선생의 유품 1천여점을 기증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로 인해 전세계 어느 문학관도 갖추지 못한 방대한 유품을 보유한 심훈 선생의 문학관 건립의 첫걸음이 시작된 셈이다.
사실 심재호씨가 당진에 심훈선생의 유품을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오래된 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심훈문학관 건립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이 나오지 않아 이뤄지지 못했다.
“옛 친구들이 그러더군요. ‘심훈선생의 유품이 어찌 네 것이냐’고. 그것들은 상록수의 고향, 당진의 것이자 한국의 것이라고. 우리 민족의 유산인 아버지의 유품을 고향 당진에 기증하고픈 마음이 당진에 대한 나의 애정이자 의무예요.”
그에게 당진은 고향이다. 칠십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마당 귀퉁이에 피었던 꽃 한송이까지 생생히 떠오르는 고향. 그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고향에 평생토록 모아온 아버지의 유품이 자신이 쏟은 정성만큼 잘 보존되어 오래도록 후손들에게 전해지길 바란다.

 

상록수 정신과 그의 70평생

그는 문득 물었다. 상록수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를 본 적이 있냐고.
“상록수라는 나무는 없어요. 상록수는 늘 푸른 나무들을 모두 일컫는 것이지 어떤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죠. 상록수 정신도 마찬가지예요. 상록수 정신은 농촌계몽운동만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을 고민하는 것, 그것이 상록수 정신이죠.”
그는 당시 심훈선생이 농촌 계몽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것은 당시 민족의 가장 큰 화두가 농촌문제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제에 수탈당하는 농촌, 그것을 막아내지 못하는 지도계층과 사회. 그 시대에 ‘상록수 정신’은 ‘농촌계몽정신’이었다는 것. 그렇다면 시대가 변한 지금의 상록수 정신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농촌문제가 아닌 분단된 민족에 대해,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겠냐고 덧붙였다.

 

<상록수 그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갔다.>

심훈선생의 ‘상록수’ 마지막 대목이다.
“박동혁은 사랑하는 채영신을 땅에 묻고 다시 돌아옵니다. 나는 그게 상록수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포기할 줄 모르는 정신. 그래서 나도 포기 안 해요. 박동혁은 그 모진 수모와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상록수 아래로 다시 걸어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내 상록수 정신,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 살아온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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