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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8.11.10 00:00
  • 호수 735

“죽을 때까지 당신의 뒤안길 내가 지켜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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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란 서로 이해하고 의지하는 평생의 동반자”

▲ 당진읍 대덕리 이규섭 남언우 부부

당진읍 대덕리 이규섭, 남언우 부부이야기

 

“이 양반이...”

신문을 쓰윽 본 할머니가 할아버지 옆구리를 꾹 찌른다. 남사스럽게 신문에 편지를 싣었냐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할아버지 옆에 꼭 붙어 앉아 수줍은 듯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도 젊었을 때 고생했다고 늘 아껴주지요. 그래도 이렇게 신문에 편지까지 낸 줄은 꿈에도 몰랐지.”

지난 734호에 실린 이규섭(79)씨가 부인 남언우(80)씨에게 보낸 편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씨는 본지 지면을 통해 60평생 가족들을 보살피며 고생하면서도 늘 변함없이 자신의 곁에 남아 준 아내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스물한 살 청년 이씨는 한 살의 연상녀 남씨를 만나 결혼했다. 대호지면 마중리에 살던 남씨가 당진읍 대덕리 이씨에게 시집 올 때만해도 대전 철도원 공무원 집으로 시집간다고 주변에서 모두 부러워했다고. 하지만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이 막 시작될 무렵 일명 ‘김창용사건’이 일어나 이씨는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자마자 남편이 군에 가버렸죠. 시아버님은 병석에 계셨고 사촌시동생 3남매까지 식구가 12명이나 됐어요. 그런데 먹고 살게 있어야죠. 쑥이니 까치밥이니 풀을 뜯어다 끼니를 때우며 참 어렵게 살았어요.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때는 다 힘들었응께.”

이씨가 군대에 가 있던 동안 지병을 앓고 계시던 시아버님의 건강이 악화되어 위독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그때 남씨는 “남편이 올 때 까지만 이라도 아버님을 지키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기도 했다. 그때의 상처가 고스란히 그의 오른손 검지에 남아있다. 이일로 추후에 남씨는 효부상을 받기도 했다.

이씨는 “아내의 지극한 효성은 내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거”라며 아내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남씨가 큰 아들을 가졌을 때의 일이다. 살기가 너무 힘들어 친정으로 돈을 구하러 가던 길이었다. 대덕리에서 대호지면 마중리까지 걸어가는데 어디쯤 갔을까. 진통이 오기 시작하고 이내 양수가 터졌다. 이씨는 그렇게 길에서 혼자의 힘으로 아들을 낳았다. 그 여파로 생사를 오갈만큼 여러 해 앓았었다고. 그 이후로 이씨가 남씨에게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회갑 때까지만 살아 달라”는 부탁이다.

“엄마가 없으면 애들이 어떻게 살아요. 그래서 늘 아내에게 부탁했었지. 오래도록 곁에 있어달라고. 마음만큼 늘 잘해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할 뿐이지.”

돌이켜 보면 참 고단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부모로서 마음만큼 뒷바라지해주지 못한 6남매가 모두 자수성가해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잘 사는 모습을 지켜보는 요즘은 남부러울 것이 없다고 남씨는 말했다.

남씨는 “부부란 의지하고 이해하며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이라며 “나이 들고 보니 역시 평생 함께 한 세월을 이해해주고 아껴주는 부부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엔 조금만 의견이 안 맞으면 쉽게들 이혼하는 것 같다”며 혀를 찼다.

남씨가 다정하게 이씨의 어깨를 안아주자 이씨가 말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또 만나서 결혼해서 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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