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뉴스
  • 입력 1999.07.12 00:00
  • 호수 282

두손 없이 쓴 일기장 '생과 운명' 28권 - 이한순, 신평면 상오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두손 없이 쓴 일기장 '생과 운명' 28권



신평면 상오리

이한순



스물 두살 때 차 사고로 육체 망가져

한쪽다리로 지탱해온 버거운 40년 기록



신평면 상오리에 사는 이한순(62세)씨는 스물 두살 이후 걸어보질 못했다. 왼쪽다리 한쪽을 허벅지부터 잘라냈기 때문이다. 두팔이라도 성했더라면 목발을 짚고라도 걸었으련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왼쪽팔은 어깨선부터 절단됐고, 오른쪽 팔도 손목까지 밖에 남지 않았다. 목발을 잡을 손이 없었던 것이다. 사지중 성한 곳은 오른쪽 다리 한쪽 뿐이었다.

이씨는 스물 두살이 되던 꽃같은 나이에 차사고로 쓰러진 뒤 다시는 두손과 한쪽다리를 가질 수 없었다. 남들처럼 손가락을 움직여 숟가락질을 하거나 글씨를 쓸 수 없었다. 뛸 수도, 걸을 수도, 제대로 설 수도 없었다.

그녀의 손을 대신하는 것은 뭉툭한 오른쪽 손목뼈와 왼쪽어깨뼈, 그리고 얼굴이다. 한때는 너무도 고와서 예쁜이로 소문났던 그녀의 얼굴은 이제 그냥 얼굴이 아니다. 특히 턱과 입은 왼쪽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집을 때 왼쪽어깨와 더불어 한짝을 이루고, 때로는 오른쪽 손목과 파트너가 되는 쓸모있는 도구다. 또 하나, 그녀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진짜 도구가 있다. 튼튼한 고무밴드다. 그것을 오른쪽 손목에 끼워 거기다 숟가락을 꽂으면 남들 못지않게 숟가락질을 잘 할 수 있다. 그것으로 일용할 양식을 취하는 것이다.

“이래뵈도 남들 하는거 다 할 수 있어요. 빨래도 하고, 바느질도 하고, 글씨도 쓸 수 있어요.”

참말이다. 심지어 이씨는 세살박이 조카손주를 지금껏 돌보아왔다. 놀라운 것은 편지지 300장 두께만큼 두툼한 그녀의 일기장이 한두권이 아니라는 것이다. 손이 멀쩡한 사람들은 게으르고 미처 그 필요성을 깨닫지 못해 쓰지도 않는 일기를 그녀는 30년전부터 꼬박꼬박 쓰고 있다. '생과 운명'이라는 표제까지 붙여서 써온 두툼한 일기는 벌써 스물 여덟권째로 접어들었다.

하루하루의 소중한 일과와 세세한 느낌, 마음 속의 갈등 같은 것을 너무도 단정한 필체로 적어놓은 것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일기들은 자신에게 남은 왼쪽어깨와 오른쪽 손목과 턱을 한 곳에 모아서 볼펜 한자루를 힘겹게 움직여 써낸 것들이다. 자신의 자취를 남기기 위해서다. 그녀는 자기 앞의 생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다.



예순 둘인데도 호적 잘못돼 경노혜택 못받아

누가 휠체어에 태워 밀어준다면... 정말 좋겠네



이씨는 어려서부터도 무척 영리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어머니 따라 셀 수 없이 이사를 다니다가 신평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에도 공장이 두군데 뿐이던 시절에 그녀는 경성방직에 취직해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낮에 일이 있을 때에는 밤에 학원에 가고, 밤교대 근무를 설 때에는 낮에 학원을 다니며 한문과 영어, 양재를 배웠다. 소금에 밥 한숟갈을 뜨고, 남는 돈은 모두 어머니를 위해 저축했다. 먹지도, 입지도, 덮지도 않았다. 그때 돈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그녀는 행복했다.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상여금을 주머니에 넣은 채 밤새 골똘한 생각에 사로잡혀 공장 탄차(석탄화물차)가 지나는 철로까지 갔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날 그녀의 운명은 바뀌어 버렸다. 돈도 벌고 한껏 배워 성공해서 돌아오리라 떠났던 고향. 그러나 탄차가 치고 지나간 뒤 그녀에게는 ‘죽음’에 대한 일념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참 어리석었다’고 이씨는 회상한다.



이한순씨는 사고 당시 고향으로 내려와 그때까지 모은 돈으로 집을 사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그런지가 벌써 40년이다. 그 사이 상이군인인 오빠는 결혼해 벌써 손주까지 두었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이씨의 곱던 얼굴도 늙었다. 게다가 온몸을 한쪽다리에 의지해온 탓에 그나마 한쪽있는 다리의 관절염이 심해져 약을 먹지 않으면 고통스럽다. 거기다 기관지염과 비염까지 겹쳤다. 약으로 지탱하다보니 위와 장도 나빠져 어떤 때는 물 한모금만 마셔도 토해낸다. 가끔 바람이라도 쐴까해서 앉은 자세로 어렵게 밖에 나가 보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이웃의 눈길이 느껴지면 금새 들어오고 만다. 그러면서도 자연과 생명에 대한 감각은 어쩌면 이리도 생생한지.

이씨는 작년 9월 어느날의 일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9월의 마지막 휴일, 가을은 무르익어간다. 자욱한 안개에 둘러싸여진 황금의 오곡들은 무르익어감에 따라 숙연한 자태로 묵묵히 인고의 손길을 기다린다. 무르익을수록 숙연한 고귀함에는 그간 서려진 애환이 어찌 없으리오마는 그래도 아름다운 결실은 여전하다 ... 이와 흡사히 ... 서려진 애환을 저 깊숙한 곳에 묻고 ... 분주한 61세의 한해를 숨차게 지냈다...'

이씨에게 정작 안타까운 것은 실제 나이가 예순둘인데도 호적에 십년 어리게 등재되어 있어 경노혜택을 못받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의수족을 하고 싶어도 장애부위가 많고 나이가 많아 무거운 국산은 할 수가 없다. 외제는 최소한 4백만원을 가져야 한다. 아쉬운 건 그것만이 아니다. 누가 휠체어에 태워 밀어주기만 한다면 그 예민한 눈과 감각으로 바깥공기를 실컷 느낄 수 있을텐데. 도무지 친구가 없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아마 이런 일기를 쓸 것이다. '오늘 누가 다녀갔다.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 같아서 고맙다. 또 이런 날을 주신 하느님께 무한히 감사드린다' 라고.

김태숙 부장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