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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1999.09.13 00:00
  • 호수 290

취재수첩/포도밭 떠난 포도축제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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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포도밭 떠난 포도축제 유감



순성면 본1리 마을에서는 오래전부터 포도를 많이 재배해 왔다. 토양이 사질토여서 물빠짐이 좋고 마을지형도 오목한 형태로 바람을 많이 타지 않는 등 포도재배에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고 있는 곳이 바로 이 마을이었다.

자연부락명은 ‘가화마을’. 이곳에서는 포도 뿐만 아니라 사과·배 등 다른 과일도 많이 재배한다. 그래서 가을에 이 마을을 찾아가면 마치 에덴동산에 온 것처럼 풍요롭고 평화로왔다. 주민들의 협동심도 남달라 마을길 곳곳엔 해바라기며, 코스모스가 줄지어 피어 있어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농로길을 따라 걷는 것도 즐거웠다.

이 마을에선 4년전부터 포도를 재배하는 젊은이들이 의기투합해 포도축제를 열었다. 밀려 들어오는 값싼 수입농산물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특유의 진한 향과 단맛이 일품인 가화포도만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는 일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마을엔 마침 부도가 나 가동이 중지된 넓은 공장터가 있었다. 사방이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포도축제는 열렸다.

축제를 보러온 손님들은 흙내음나는 땅바닥에 주저 앉아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흥겨운 잔치를 바라 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자리에는 누가 가져 왔는지 큼지막한 포도 한송이씩 놓여져 심심한 입을 달랬다.

농사만 지을 줄 알았던 30여명의 포도작목반원들이 준비한 포도축제는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이 있어 해를 거듭할수록 축제를 찾는 주민이 늘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생산한 농산물의 판로를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젊은 농군들의 의지가 축제의 의미를 더욱 깊게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축제는 열렸다. 전에 없이 포도농사가 잘된데다 때를 잘 맞춰 포도가 익지 않아 발을 굴러야 했던 그 어느 해의 걱정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나 올해 포도축제는 과수원이 있는 마을공터가 아닌 당진군민회관에서 열렸다. 마을길이 비좁아 차를 갖고 축제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불편을 주었기 때문에 주차공간이 넓은 군민회관으로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물론 마을단위 행사였던 가화포도축제를 군단위 행사로 키워 보겠다는 젊은이들의 야심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시멘트 벽으로 둘러쳐진 군민회관에서의 축제는 어딘지 춥고 썰렁했다. 작은 몸집으로 행사를 크게 벌이다 보니 곳곳에서 무리가 뒤따라 풍물가락 대신 협찬사의 요란한 판촉전이 행사장을 압도했고, 포도밭을 대신해 행사장 주변엔 휘황한 불빛의 야시장이 들어섰다.

행사장을 찾은 주민들은 자유롭게 포도맛을 보며 축제를 즐기기 보다 군민회관에 나란히 진열된 의자에 앉아 누구나 아는 포도의 효능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정치인과 기관장들의 연설을 들어야 했다.

생산의 현장을 떠나 열린 포도축제는 ‘행사’는 있었지만 ‘문화’는 없었다는 평을 들었다.

포도축제에 애정을 갖고 있던 여러 지역주민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군민회관에서 축제를 연 이유가 교통혼잡 때문이었다지만 어차피 불편은 좁은 시골길에 차를 몰고 간 사람이 감수해야 할 몫이 아닐까. 군단위 행사로 키우겠다며 장소를 옮긴 것도 위험한 발상이었다는 지적이다. 이는 상록문화제를 전국 행사로 키우겠다며 서울에서 여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어째서 가화포도가 다른 포도와 다른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알리는 방법은 바로 가화포도가 생산되는 본1리의 독특한 지형과 수십년간 정성을 들여 가꿔온 포도재배단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어느 농민의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소비자들을 생산현장으로 불러들이는 것, 농산물 축제의 경쟁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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