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덕읍 신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광활한 평지에 자리한 ‘신리’는 평야 중심에 자리한 점과 부농들이 있는 관계로 한국전쟁 중 9.28 서울수복 때 일종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마을의 부농들은 라디오를 통해 서울수복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대전리 창고에 가뒀던 좌익인사들이 도망치자 들 가운데에 있는 ‘신리’로 다시 임시감옥이 옮겨졌으며 이곳에서 후퇴하는 좌익과 대치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생이었을 때 이 대치전을 목격했다. 이때 인근 신암등지에서는 좌익인사들을 ‘수장’하는 일들도 있었다는데 신리에서는 그같이 참혹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군이 입성할 때도 당진읍보다 먼저 ‘신리’를 거쳐 갔는데 신리는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제일 먼저 ‘반공시범마을’로 지정되었다. 사진은 서울수복 후 반공시범마을로 지정된 신리에서 대한청년회 등을 중심으로 식량재건에 들어간 모습이다. 평야지대에 끝없이 늘어선 줄모내기 인파는 전쟁의 폐허위에 다시 삶을 재건하려는 집념을 보여준다. 희망이라고 하기엔 너무 처참한 경험을 한 뒤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 ‘살 수 있다’는 것은 희망이었다고 부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진 규 / 합덕읍 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