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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1999.11.08 00:00
  • 호수 297

그림 속에 다시 피는 젊은 날의 열정 - 유동초, 그림교실 수업받는 주부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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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 다시 피는 젊은 날의 열정



매일 네시간 '그림교실' 수업에 열중인 '주부화가' 20명

폐교된 유동초 교실 한 칸은 그들의 '비밀의 화원'



젊은 날의 꿈을 펴놓고 조심조심 새삶의 밑그림을 그린다

추운 교실에서 컵라면으로 떼우는 점심 또한 즐거움이다

이제 모임의 이름도 짓고 내년 봄·여름사이

조그만 전시회도 열 생각이다.



겨울이 찾아드는 유동초등학교 교정은 그대로 한폭의 그림이다. 폐교된 뒤 화가 박기호·구현숙씨 부부가 임대해 개인작업실로 이용하기 시작한 이곳은 일종의 문화공간으로 지역에서 이미 이름이 나 있다.

요즘 이곳은 전혀 색다른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30~40대 주부 20여명이 접었던 젊은 날의 꿈을 펴놓고 조심조심 새 삶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올 4월, 화가 박기호씨 부부가 이곳을 좥주민을 위한 그림교실좦로 개설하면서 이곳에 주부들의 발길이 나게 되었다.

늦가을 노란빛의 햇살을 받아 등걸이 빛나는 나무들과 교정. 학교건물 맨 왼쪽의 교실 한 칸이 이들의 작업실이다. 매일 오전10시부터 둘, 셋씩 짝을 지어 들어와 애교스러울 만큼의 수다를 떨며 커피 한잔을 함께 마시는 것으로 이들의 작업일과는 시작된다. 아침을 소홀히 먹었을지 모르는 동료를 위해 집에서 만든 피자나 간단한 음식을 싸들고와 권하기도 한다.

수확기 바쁜 농사일 때문에 며칠 걸러 나온 김순진(40세)씨는 어디서 다시 그림을 손대야 할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지금 그리고 있는 단계는 데생을 지나 유명화가의 그림을 모방해 그리는 명화카피(Copy) 단계. 색감을 익히고, 화가의 사상과 느낌을 이해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그림세계와 일치하는지 알 수 있는 단계라고 한다. 김순진씨는 집에서 온 연락을 받고 오전작업만 하고는 돌아갔다. 아마 마늘파종을 하러 갔을게다.

당진읍내에 사는 홍승희(40세)씨는 도시에서 이사와 당진의 조용함이 갑갑해져 우울증이 올 무렵 이 그림교실을 만나 생활이 도로 즐거워졌다.

석문면 교로리에서 버스를 두번씩이나 갈아타며 그림 그리러 오는 황묘선(44세)씨. 동생 미혜(38세)씨와 나란히 그림을 배우는 황씨는 아직 데생단계인 초보지만 조용함과 열성으로 왕언니 노릇을 하고 있다.

창가에서 화가 램브란트의 모방화를 그리는 윤경식(32세)씨. 출석 일주일째인 왕초보 이경화(30세)씨. 7월부터 다니고 있는 이남순(31세), 조영호(35세)씨. 그림에 대한 열정을 못견디고 이곳에 오기 전에 사설 개인지도까지 받은 적 있다는 임의규(38세), 백 크리스티나(36세)씨. 최종순(33세)·이병화(36세)씨는 각각 응용미술과 서양화를 전공한 미술학도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가 주부이며 보통 아이 두명을 키우고 있으며 시부모를 모시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매일 자신의 작업을 하는 와중에 이들을 둘러보며 그림지도를 하고있는 화가 박기호씨는 ‘늦게 발동한 주부들의 열정이 대단하다’고 말한다. 데생에서 모방화, 정물화, 자화상을 그리는 단계를 지나면 그들마다 모두 독특한 자기만의 그림세계를 갖게 될 것이라고 무일푼인 강사노릇을 뿌듯해 하고 있다.

바쁘고 변함없는 일상, 그 빠듯한 쳇바퀴 속에서 잠깐씩 벗어나 잊었던 꿈을 키우는 그들만의 세상이 더없이 크고 행복해 보인다. 한명씩 물어봐도 모두 행복지수 만점이다.

추운 교실에서 컵라면으로 떼우는 점심은 오히려 이들에겐 즐거움이다. 아이 때처럼 사탕을 물기도 하고, 수다도 떨며 등교한 아침부터, 수업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오후2시까지 교실 한 칸에 마련된 이들의 작업실은 '마술의 성'이다. 아니면 좥비밀의 화원좦.

이제 모임의 이름도 예쁘게 짓고 내년 봄에서 여름사이 조그만 전시회도 열고 나면 이들은 지나온 시간들의 남 모르는 고충을 털어 놓으며 울먹일지 모른다.

모두가 돌아간 교실 창밖에 단풍이 눈시리게 붉다.
김태숙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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