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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학신문 지령 500호 기념축시 - 이상룡
2005년 02월 18일 () 15:04:00 webmaster@mjmedi.com
   
 
그대 이젠 불을 밝혀라

이 상 룡

그대 한 줌 흙이었을 때 언젠가 쓸만한 질그릇 되어 밤 깊도록 목이 갈한 이들 잠결에도 허기로 뒤척이는 이들 위하여 오른 손에 가볍게 들리우는 희망이기를 바랬다. 한 번도 빈 틈을 보이지 않는 땅 속 깊은 어둠에 살을 섞고 이리저리 스며든 세월의 실핏줄을 따라 몸을 만들었지만 때로 울창한 숲을 지탱하고도 남을 넉넉한 품새를 배웠고 때로 갈 곳없는 겨울 짐승들 언 몸을 녹이는 둥근 집을 꿈꾸기도 했다. 세상 먼저 나선 것들이 무수히 짓밟히고 파헤쳐져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갈 때 어느 누구도 대지의 거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간밤 무서리에 단단해진 침묵으로 아침을 맞이하지만 늘 날 빛에 스스로 무너져 내리면 들풀이며 나무며 하찮은 푸성귀들조차 건방지게 발을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래 사랑은 뭐든지 용납하는 거라고 샛강을 따라 이름없는 바다에까지 무모하게 몸을 내어준 한 쪽이 늘 몸살을 했다. 언젠가 세상 먼저 나선 것들이 짓이겨져 캄캄한 역사 속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올곧은 정의의 물레를 타고 세상에 나와 공의와 사랑과 진실이든 무엇이든지 가뿐히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틈실한 화병이라도 되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꽃들의 아랫도리를 품고도 싶었는데,

그대 이젠 심지를 다시 돋우어
불을 밝혀라
어둠에 취해 휘청거리는 세상
문득 깨어나도록

아픔이 엮어내는 투명한 눈물도 담아내고 상처 깊은 세월에 등이 굽은 사람들 한숨도 담아내어 언젠가 이 땅에 공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날 더 이상 할 말이 없더라도 기꺼이 그대 한 줌 흙으로 버려질 땐 먼 훗날 누군가가 깨어진 질그릇 조각조각 맞춰가며 다시금 물레를 밟으리라 역사를 위하여 위하여.


작가 약력 : ▲1958년생 ▲1985년 1월 심상신인문학상에 절름발이 외 5편 당선으로 문단 등단. 작품집으로 ‘거듭나기’ ‘어디인들 당신 앞이 아니겠습니까’ ‘성경과 한방 이야기’ ‘의원아 네 병을 고쳐라’ ‘나는 마음대로 산다’ 등 ▲현재 우석대 한의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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