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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 속의 지우개
2005년 03월 18일 () 14:02:00 webmaster@mjmedi.com
   
 
최루성 멜로드라마 계보 잇는 영화

얼마 전, 10여년 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미안했던 적이 있었다. 그 친구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을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여실히 실감한 순간이었다. 물론 사람이 자기가 겪었던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생각날 때도 있는데 전혀 생각나지 않을 때의 괴로움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이렇게 기억 손상에 대한 소재는 최근 영화나 드라마의 화두로 떠오르며 ‘깨어나 보니 기억상실증’이라는 말들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젠 좀 더 폭을 넓혀 일명 치매로 일컬어지는 알츠하이머까지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지난해 초, 가족에 대한 진한 사랑을 느끼게 하며 감동을 전해준 드라마였던 <꽃보다 아름다워> 역시 주인공인 엄마 이영자(고두심)씨가 알츠하이머를 앓으면서 모든 기억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며 시청자들의 눈물을 한껏 쏟아낸 적이 있었다.

이 드라마의 젊은 사람 버전 영화인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알츠하이머를 앓는 여성의 슬픈 멜로 드라마로 지난 가을 개봉하여 한국 영화 관객들의 눈물을 쏟게 했던 영화다.
건망증이 심한 수진(손예진)은 편의점에서 콜라를 사고 깜박 두고 나온다. 그 뒤 다시 찾아간 편의점에서 철수(정우성)를 만나게 되고, 한 눈에 반한 그들은 이후 사랑을 키워나가며 결혼을 하게 된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건망증 증세가 너무 심해진 수진은 병원에 갔다가 알츠하이머라는 판명을 받게 되고, 철수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이겨내며 더욱더 아껴준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지금까지 어르신들에게만 오는 병인줄 알고 있던 알츠하이머가 20대의 젊은 사람도 걸릴 수 있다는 사회적으로 매우 민감한 주제를 선택하면서 이 병에 대한 경각심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게 느껴질 정도로 그들의 가족이나 주변 인물들은 모두 배제한 채 두 남녀의 사랑스러운 모습만을 보여주면서 그들만의 영화로 전락해 버린다.

예전의 <편지>, <약속> 같은 영화의 계보를 잇는 최루성 멜로드라마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만 전형적인 스토리 라인과 시도 때도 없이 관객들을 울리기 위한 장치들은 마치 ‘이래도 안 울래’라고 강요하는 듯 비춰지면서 애잔한 사랑의 모습이 억지스럽게 다가온다. 또한 알츠하이머가 단순히 기억을 잃어가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못 알아본다는 점까지만 해석하고, 그들이 겪어야 하는 모든 아픔은 마치 영화 속 지우개로 다 지워버린 듯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일본의 TV 드라마를 각색한 것으로 개봉 당시 한국 영화 사상 최고가로 일본에 역수출 된 영화이기도 하다.

황보성진(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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