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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입력 1998.11.30 00:00
  • 호수 250

여기는 당진의 오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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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아래 첫 동네 산아래 끝 동네
해발 250m에 앉아있는 면천면 죽동2리 좥음고개좦마을

당진에서 면천방면으로 가다 폐차장을 지날즈음 왼쪽으로 「새샘기도원」이라는 푯말이 보였다. 푯말을 따라 갓길로 접어들자 전날 내린 눈으로 서늘하게 젖어있는 흙과 나무들 사이로 차 한대가 간산히 지날만한 길이 나 있다. 지금부터는 한대씩, 혹은 한 두사람씩 조용히 들어오라는 투다. 마을안길이면 평평하게 이어져 있어야 제격인데 꼬불거리며 갈수록 경사가 높아져 마치 산을 타는 기분이다.
이집 저집 처마밑까지 달려가 끝을 내렸을 실가지 같은 길들. 그위에 어색하게 칠해진 아스콘포장이 ‘이곳도 피할 수 없는 세속(世俗)’임을 주장할 뿐, 이미 은밀하고 낯선 곳에 와있는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
이 왼쪽으로 꺾어들어간 길은 갑돌이네 집앞까지 가는 길일까. 오른편 길은 순녀할멈넨가. 행여 길을 잘못 들었다쳐도 차를 돌릴 여분의 땅도 없는 것은 길을 잘못들 이유도 없고, 이웃간에 속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이곳 사람들만의 말없는 자랑같아 함부로 투덜댈 수도 없었다.
풀냄새라고 해야 될까. 바람냄새라고 해야 될까. 아니면 서늘한 창공의 기운이라고 해야 될까. 해발 350m의 아미산이 뒷동산처럼 다정하게 서있고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은 곳에 내리니 여느 산골과는 또다른 산골동네가 있다. 이곳은 해발 250m 지점에 자리한 면천면 죽동2리.
까치발을 서면 아미산 능선도, 파란하늘도 손에 닿을 듯이 가깝다. 산중턱에 걸터있는 이 마을은 하늘아래 첫 동네, 「음고개」 마을이다
‘음고개’라는 지명은 이곳 주민들도 여러가지로 해석하고 있었으나 원래 이곳이 면천군 송암면 엄치리(奄峙里)였던 것으로 보아 엄치(奄峙)의 구음인 것으로 보인다. 좥문득:엄(奄)좦자에, 좥우뚝 솟아오를:치(峙)좦를 쓴 걸 보니 문득 이런 상상이 발동한다.
좥하늘신이 먼 발치의 사람사는 동네들을 한바퀴 휘 둘러본 뒤 시선을 거두려던 차였다. 바로 코밑에 울창한 수풀에 가린 기가막힌 마을하나를 보고 문득 눈에 크게 떴다. “아참! 내 이곳에도 마을을 두었었지”좦
이런 마을에 여느 동네와 똑같이 슬라브지붕에 빨간벽돌로 지은 마을회관이 앉아있는 모습은 정말 어색해 보였다. 그래도 뜨뜻한 보일러를 깔고 앉아 담소중인 어르신들은 사뭇 흐믓한 표정들이시다. 찾아오는 객이 별로 없어서인지 잠시 어색해하다가 이내 반가이 맞아들 주셔서 빈손들고 간 객이 더 멋적었다.
마을회관, 방안에 빙둘러앉은 어르신들은 서로 미루는 듯 하면서도 앞다투어 말씀들을 하셨다.
“요 위루 가면 은바위라고 있는디 하두 신령스런 바위라 잡귀, 잡병이 못들어왔디야.”
“아마 은(銀)도 좀 캐냈다는구만 그려. 예사 바위허곤 다르지, 은바위가 있어서 은고개라 불렀겄지 뭐.”
마을이름의 내력에 대해 들은 것들을 이리저리 쏟아내셨다.
“옛날에는 감나무, 밤나무가 하두 많어서 집들두 안뵀어. 워떻게나 나무가 높이 우거졌는지 하늘밖엔 뵈는 게 읍었디야.”
그래서 나무그늘에 가렸다해서 그늘 ‘음’자를 써서 음치라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다른 한분이 거드셨다.
해방전만 해도 이곳 좁은 마을에도 칠팔십호가 다닥다닥 붙어 살았다고 한다. 가파른 데다가 워낙 땅도 좁아서 밭뙈기가 얼마되지 않았지만 당시만 해도 재너머 당진, 순성 근방에 논을 가진 이들이 많아서 부자였다고도 한다. 그 시절엔 기지시장이 커서 그리로 쌀 팔러가곤 했는데 ‘음고개 장꾼들 없으면 장이 안선다’고 할 정도였다.
이곳은 또 ‘청주한씨’ 집성촌이어서 한씨들이 기지시장을 휩쓴다 하여 ‘한틀무시’라 불렀다고 한 어르신께서 농반 진반으로 말씀하셨다.
“워디 그뿐인중 아남. 기지시 난장에 가믄 씨름에 이겨갖구 황소 한마리씩 타갖구 오는 건 맨 음치였어.”
“또 그땐 다덜 힘장사만 있어서 팔뚝만헌 깃대에 동리깃발 흔들면서 가믄 다른 동리서 촌티난다고 워떻게나 해쌓는지... 그래도 그거 붙들고 다니지 못허는 사람은 품앗이도 써주지 않았어.”
지대높은 산동네여서 그랬는지 그때도 다른 동네보다 사람들이 건장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없어진 첫 마을회관도 주민들이 흙이나 돌 따위를 직접 져날라서 만들었다.
“돌두 많았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 돌담 쌓아갖구서리미 구분졌지. 동네가 맨 돌 천지였으니께.”
지금도 회관 맞은편 집 한채는 돌담으로 바닥을 높인 그대로 있어서 돌이 많은 제주도나 40~50년대 상황극 세트장에 온 느낌마져 들었다. 그러던 엄치리가 지금은 스물여남은 호가 사는 조용한 죽동리(竹同里)로 바뀌었다.
여전히 노인들은 정정한 편이라 나이 아흔되신 어른이 두분이나 계시다. 게다가 젊은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 이 마을에선 나이 육십이면 젊은이다. 회관에 모인 어르신들은 숫제 ‘예순’을 기준으로 “넌 여섯살, 난 일곱살, 이 형님은 열다섯살” 이렇게 부르고 있었다. 아직 장가 안간 30대 총각이 둘, 40대가 두셋 있지만 이 마을의 이장을 지낸 한상현씨나 이장 한시현씨 모두 이 마을에선 젊은(?) 50대 나이다. 초등학생이라곤 단 두명 뿐.
그래도 스물네집까지 줄어들었다가 최근에는 몇가구가 늘었다. 물 맑고 공기 맑아서 그런지 몇년전부터 이리 이사 들어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서울이나 도시에서 들락거리는 사람들도 발길이 잦았었다. ‘그러던게 IMF 터지더니 그만’이었다.
경기도 성남에 사시다가 교사인 딸부부가 불러 이곳 죽동리에 오게 됐다는 박할아버지(67세)가 그런 경우다. 말씨에 도시티가 나긴 했지만 여기 할아버지들과 잘 어울려 평화로이 지내시는 듯 했다.
그러나 막상 10대째, 혹은 8대째 이곳에 살아 오셨다는 할아버지들은 또 감회가 제각기인 모양이었다.
“푹 잠겨 산 거지, 뭐. 여북허면 이러구 살어.”
허기사 넓은 논도 아니고 힘들고 험한 밭뙈기 좀 부쳐먹으며 나가고 싶어도 나가 살지 못한 경우는 속이 상했을만도 했다.
요샌 이 근처 취나물이 꽤 짭짤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얼마전 ‘SBS 내고향’에 방영된 적도 있다. 그 바람에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부끄럽다고 면에서 지붕개량비를 지원해줘 멋스럽던 초가지붕 한채가 함석지붕으로 바뀌고 말았다.
지금 이 마을에는 스물일곱가구중 스무가구가 청주한씨 집안손들이다. 마침 다음날이 시젯날이라고 한씨종친회 한관우 회장님과 총무인 한상현 전 이장님이 읍내에 다녀오신 길이었다.
“저희 15대 할아버지가 통훈대부 행선 공감 봉사(병조참판 정도 되는 벼슬)를 지내셨는데 화성군에 있던 그분 묘를 이쪽으로 옮겨오게 됐습니다. 또 그분의 손주뻘 되시는 분이 임진왜란 때 무장을 지내시면서 아마도 그때 이쪽으로 일가들을 피신하게 한 게 아닌가 싶어요.”
이곳이 한씨 집성촌이 된 내력을 나름대로 추론해본 한상현씨의 말이다.
마을회관 안에 앉아서도 창밖으로 나지막히 마주 보이던 아미산은 문밖으로 나서니 아이들 나물 뜯으러나 감직한 낮은 뒷동산이다.
‘범죄없는 마을’로 상을 받은 적이 있다는 말이 새삼스러울 지경이다.
큰 길까지 한 30분을 걸어나간 뒤 큰길 따라 더 가야했던 죽동초등학교가 문을 닫아 이 마을 두명의 초등학생은 면천으로 다니고 있다.
‘여기앉아 아미산 참나무 크는 걸 보며 그걸 낙으로 삼고 산다’는 한 어르신의 말씀이 걸음에 남는다.
× × ×
하늘아래 첫 마을, 산아래 끝 마을 「음고개」. 하늘의 손이 처음 닿아 아마도 첫 정성으로 빚어내고 씻어냈을 동네, 해맑은 동네. 하늘과 산이 주는 메세지를 고스란히 받아안으며 급할 것도, 쫓길 것도 없이 고요하게 사는 마을 음고개.
음고개는 엊저녁 눈도 털지 않은 채 쌓인 눈속에서 호호 손을 불며 앉아있는 노란 들국처럼 아미산 산등성이에 그렇게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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