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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담긴 이야기 <그날>
남연군묘 도굴사건, 쇄국정책을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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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연군묘 도굴사

햇볕이 따뜻하게 드는 가야산에 남연군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와 보니 저 멀리 까지 내다보이는 것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옛날 가야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인데 유명한 지관이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라는 말을 흥선대원군에게 전하게 됐고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불에 태운 후 아버지 남연군묘를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고종과 순종 2대에 걸쳐 왕이 나온 것을 보면 명당자리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실패로 끝난 오페르트 도굴 사건
어두운 밤 한 무덤 앞에 여러 그림자가 무언가를 열심히 파고 있었다. 그 무리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 조선인 신부, 미국 상인 등이 있었다. 그들은 흥선대원군을 협박하기 그의 아버지인 남연군묘를 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어떤 나라와도 교류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페르트는 흥선대원군과의 유리한 협상을 위해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는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묘는 주변의 두꺼운 바위들과 단단함 때문에 도굴은 실패로 끝이 났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흥선대원군은 크게 화를 내었고 이 일로 인해 더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는 쇄국정치를 폈다.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백성들에게 알렸다.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법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도굴 사건이후에 조선인 신부가 남연군묘까지 안내를 도왔다는 이유로 천주교 박해가 더 심해지기도 하였다.

역사를 되돌아보며
일본은 일찍이 서양과의 교류를 통해 빠른 근대화를 이뤘다  만약 우리나라도 우리 것을 지키려는 노력과 함께 개국을 위한 준비와 개국 후의 질서에 대해 고민을 통해 근대화를 맞이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렇다면 아직까지 남아있는 일제식민지의 아픈 역사도 없었을지 모를 일이다
 
어린이기자단 원당초 5학년 송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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