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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시노인복지관 시치료 프로그램 참여한 이경숙 씨(읍내동)
움츠렸던 인생 詩로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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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실부모 하고 남편까지 일찍 떠난 지난 세월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새롭게 발견한 인생”

 

님은 왼쪽 길 난 오른쪽 길
양 갈래 길목에서
남과 나는 갈 길이 달랐지요
그렇게 님은 떠나시고
나 홀로 외로이 서 있네요

- 님 떠나신 길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70년을 살았다. “못해요.” “몰라요.” “할 수 없어요.” 지난 세월 동안 인생을 채운 말들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었다. 그리고 결혼 6년 만에 남편과 막내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면서 자신도 모르는 새 뭉친 마음의 응어리가 오래된 송진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로 살았다. 그게 아픔인 줄도 몰랐다. 그러다 일흔의 나이에 시(詩)를 만났다. 처음으로 내면 깊숙이 숨겨둔 자신과 대화할 기회를 얻었다.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을 용서하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일이었다.

“내 마음이 들리니”
지난해 칠순을 맞이 한 이경숙(71, 읍내동) 씨는 2016년부터 2년 동안 당진시노인복지관 시치료 프로그램 ‘내 마음이 들리니?’ 수업에 참여하게 됐다. 복지관 직원이 이 수업을 처음 권했을 때 그는 손사레를 치며 거절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않아도 되니 일단 한 번 참여해보라”는 거듭된 설득에 마지못해 발을 디뎠다. 한 두 번 강의를 듣고 그는 수업에 나타나지 않았다.

“시에 시옷도 모르고 살아왔어요. 거친 풍파 속에 모진 세월을 살면서 배움 또한 짧은 나 같은 사람이 시를 읽어본 적이 있겠어요? 너무 부담스러워서 수업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어요.”

시를 읽어본 적도 없는 그가 시를 쓴다는 것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단 몇 줄의 짧은 시지만 꽁꽁 숨겨 왔던 인생을 풀어내 글로 남겨야 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이경숙 씨 뿐만 아니라 시치료를 처음 접한 다른 노인들도 그러했다. 프로그램을 운영하다 보면 한 두 번 수업에 참여한 뒤 출석하지 않는 어르신들이 몇 명씩 꼭 있었다. 그럴 때면 복지관 직원과 시치료 강의를 맡은 김선순 강사(지혜의 숲 당진센터장)가 설득에 나섰다.
“시 안 써도 되니까 그냥 오세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돼요. 이왕 시작했으니 끝까지 함께 가요.”

살아온 인생이 한 편의 시
김선순 강사는 대신 노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살아온 인생 하나하나가 한 편의 드라마이자 시 그 자체였다. 김 강사는 노인들의 이야기로 시를 지었다. 노인들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아슈?” 자신의 인생이 시가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이들의 삶에 시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공감, 그리고 위로. 그게 시의 힘이었다. 그렇게 이경숙 씨도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

김선순 강사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던 이 씨에 대해 “마치 여리디 여린 수선화 같았다”고 표현했다. 이른 봄 수줍게 피어났지만, 바람에 흔들리며 금세 꺾일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활짝 핀 봄날 개나리 같단다.

숨죽여 살아온 지난 날들
이경숙 씨는 3살, 6살에 아버지, 어머니를 차례로 여의고 46년 전 중매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는 경북 정촌에서 하루 온종일 걸려 남편의 고향인 당진에 왔다. 친정을 자주 갈 수도 없는 상황, 낯선 곳에서 믿고 의지할 건 남편과 아이들 뿐이었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도 찰나, 결혼 6년만에 남편과 막내아들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내야 했다.

이 씨는 “왜 나에게만 이런 불행이 찾아오는지, 참으로 박복한 팔자라고 자책했다”며 “홀로 남매를 키우며 평생을 살았다”고 말했다. 남편을 잃고 홀로 살아가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무시, 온갖 유혹들을 견뎌내면서 그는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숨죽여 살아야 했다. 세상 밖으로 자신의 속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평생 죽을 때까지 혼자 짊어지고 가야할 멍에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바르게 잘 자랐다. 사춘기가 찾아왔는지도 모르게 속 썩이는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그러다 어느 날 “저는 집 나가고 싶었던 적 없었는 줄 아세요”라는 아들의 말에 눈물이 쏟아졌다. 아이들에게 사춘기가 없었던 게 아니었구나, 내 깊은 상처로 인해 아이들의 아픔을 돌보지 못했던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숨겨온 그는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조차도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칠순 선물로 시집 출간
시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그는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이 든다. 마냥 불쌍하기만 했던 자신의 인생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만 불행한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들에게도 시가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니 지난 세월 동안 담아뒀던 내면의 세계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어느 날엔 몇 시간씩 책상에 앉아 수십 장의 글을 쓰기도 했다.

지난해 말, 아들과 딸은 칠순 선물로 그의 시를 시집으로 엮어 선물했다. 남매는 ‘욱진·현정북’ 이라고 자신들의 이름을 출판사명으로 삼고 엄마의 이름이 아로새겨진 시집 <바람은 불어도>를 출간했다. 부끄러운 솜씨지만 인생이 담긴,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해 준 더 없이 소중한 선물이었다.  

“너무나 행복합니다.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나도 시집을 낼 수 있구나, 이 나이에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여생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게 살다가 편안하게 가고 싶어요. 그게 마지막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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