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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입력 1997.09.08 00:00
  • 호수 190

서금구의 사람아 사람아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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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구/본지 객원기자
합덕대건노인대학장
(0457)363-1991

구 자 숭(순성면 중방리)
치부에도 원칙이 있다. 근면과 신용, 절제와 검소가 그것이다

하루는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여행을 하다가 잠시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그 틈에 타고 온 말들이 남의 콩밭에 들어가 마구 헤집어 놓았다. 이를 본 농부가 씩씩거리며 달려와 밭값을 물어내라며 호통을 쳤다. 제자인 자공이 나서서 용서를 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때 제일 나이어린 제자가 농부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농부님의 밭은 정말로 큽니다. 그러니 제 말이 농부님의 콩밭말고 어디 갈곳이 있겠습니까. 콩밭을 망친 것은 제 말의 잘못이지만 넓게 보면 농부님의 밭이 너무 큰 탓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 밭만큼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농부는 그 말에 크게 웃으며 “당신은 예절이 있소이다”라고 말하고 용서해 주었다.
세상을 너무 영리하게만 살아가려 애쓰는 사람을 보면 그들에게는 한결같이 하나의 공통점을 엿볼 수 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너무 작고 가볍게 본다. 얕은 꾀와 잔재주가 그들의 삶의 방식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들에게는 다만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한 문제이지 결코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다. 정직한 남을 비방하여 그 정직을 자기 것으로 도둑질하거나 부지런한 타인을 헐뜯어서 그 부지런함을 자기 것으로 가로채는 수치심마저도 버리고 사는 것이다.
우리모두는 외적인 인간의 성장은 수준급까지 도달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적인 나, 즉 자아(自我)의 성장등 외적인 나와 균형을 이루면서 성장돼 있느냐는 생각할 문제이다. 지식은 배워서 익힐 수 있지만 내적인 나의 성장은 지식만으로 안되는 것이다. 자아의 성장은 “지혜”로써 성장하게 되는데 지혜는 스스로 창출해야 한다.
지혜를 창출함에는 그 밑거름으로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지식을 바탕으로 지혜를 쌓는다면 바른사람, 인품을 지닌 교양인으로 모두에게 칭송을 받는 인격자로 자리를 잡게되는 것이다.
9월 2일 한서대학 합덕교육원(합덕대건노인대학)에서 당진지역 여성지도자를 위한 교양대학(1년과정)이 개원하게 된 것도 지식을 바탕으로 지혜스러운 인간창출에 도우미 역할을 담당하고자 함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영리하고 거룩하고 유일하면서 다양하며 정묘하다. 민첩하고 명료하게 맑고 남에게 고통을 주지않으며 자비롭고 날카로우며 강인하고 은혜로우며 인간에 빛이 된다”(구약성경 지혜서 7:22)
구자숭씨!
“청년(자녀)에게 재물을 남겨주면 대다수의 경우 그 청년에게 불리하다. 가난 속에서 노력하는 것이야 말로 청년에게 이익이 된다”(카네기 자서전중)
구자숭씨는 당진군 송악면 가교리에서 능성구씨의 집성촌에서 출생했다. 차남으로 태어나 넓은 논과 밭을 물려받고 분가해 3남3녀를 양육하고 교육시키는 데 어려움없는 재산을 갖고 있었다. 호탕한 성격이라 젊어서는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주유천하(周遊天下)하는 좋은 시절을 만끽하였다.
부자는 날개없어도 날고 다리없어도 달린다는 속담이 있다. 그 만큼 부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이다. 바로 구자숭씨의 청년시절과 근사점이 있다고 하겠다.
구자숭씨는 30대 중반에 중병에 걸렸다. 옛것을 고집하며 재래요법처방에 의존하던 집안어른들이므로 민속치료요법에 병이 더 무거워감으로 무속에 의존하기까지 1년여의 병환으로 사경(死境)을 헤매게 되었다. 결국 서울대 의대병원으로 실려가 “간티스토마”로 판정되어 3개월여만에 완치되어 귀향하게 되었다.
구자숭씨는 1년6개월의 중병치료비로 많던 가산(家産)은 폭싹 무너져 몇푼 안남은 돈으로 현재 살고 있는 순성면 중방리로 꼭 30년전 이사를 했다. 구자숭씨는 이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앞이 캄캄하더군요. 먹을 양식도 문제지만 큰아들 고등학교 재학으로부터 6남매의 교육비 부담이 큰 문제로 괴로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가난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부도 똑같이 잘 다루지 못한다고 하였다.
구자숭씨는 이때부터 가문의 명예나 체면따위를 털어버리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건축현장에서의 막일꾼, 전국을 누비면서 돈이 될성 싶으면 무엇이나 사고 파는 떠돌이 상인으로 약 20년을 활동하게 되었다.
생재유대도(生財有大道)(대학전)라 했다. 재산을 모으는데 크고 올바른 길이 있다. 치부하는데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는 것이다. 근면과 신용과 절약과 검소의 덕으로 치부를 해야한다는 뜻으로 풀이하면 무난할 것이다.
구자숭씨!
이때 궁핍한 생활을 알고 큰아들이 대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채용시험에 응시, 많은 경쟁자를 뛰어넘었다. 세관공무원이 된 것이다. 박봉인 공무원으로 아버지 구자숭씨를 대리하여 밑에 줄줄이 이은 동생들의 학자금을 충당하게 된다.
구자숭씨는 어렵고 지겨웠던 20여년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가난하고 구차스럽던 생활이었지만 다행인 것은 6남매 모두 바르게 명랑하게 자라주었다는데 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6남매중 딸자식들은 모두 출가하였으며 아들로 둘째는 공주사대를 거쳐 서울근교의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고 막내아들은 단국대 법대를 4년 장학금으로 졸업, 학사장교를 거쳐 지금은 대학원생으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우리시대의 모든 부모들의 공통적인 인자들이다. 결코 과거로써의 얘기꺼리로 지나칠 사항이 아니며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의 큰 거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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