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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입력 1997.09.15 00:00
  • 호수 191

“휴전선에서 70리 지척, 황해도 옹진군이 내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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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에 피난온 이입분 여사의 ‘그리운 아버지’

어느 실향민 부부의 쓸쓸한 추석맞이
아버지 성묘 누가 해드리나

추석이다. 민족이 대이동하는 명절이다. 그러나 바다건너, 심지어 대륙을 건너서 가족과 고향의 품으로 잠시 돌아와 안기는 때에 지척에 고향을 두고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바로 그들이다.
구경꾼들에게는 해마다 매스컴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들의 망향가와 눈물이 한낱 반복되는 광경일 뿐이지만 그들에겐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애끓는 그리움이다.
당진군에도 수십세대의 실향민 가족이 남다른 명절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주로 신평면 신흥리와 매산리, 맷돌포에 정착해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평면 매산리의 끝마을, 깔판에 사는 이입분(64세)씨는 추석명절이 다가오는 요즘 부쩍 남편과 할말이 많아졌다. 북한의 식량난을 계기로 물이 오른 통일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재촉하는 남편 서정태(70세)씨의 성화도 성화려니와 요새는 하루가 가는 게 심난하다. 두고온 고향, 두고온 아버지 때문이다.
이씨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군 봉구면 부푸리 가마께라는 해변마을. 지금 그 지명들이 남아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떠나올 때 그 자리에 있던 아버지의 묘소만은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입분’이라는 이쁜 이름을 지어주신 아버지. 예쁜 셋째딸을 업어주고 얼러주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묘지위에 엎드려 한번이라도 아버지 이름을 불러 볼 수 있다면... ‘아버지’라고.

이북이래봐야 휴전선에서 고작 70리 떨어진 지척에 고향을 둔 이씨에게는 실향의 안타까움이 더 크다. 누구나 그랬듯이 전쟁통에 밀리고 돌아가기를 여러번 했던 이씨는 설마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일제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조선을 각각 남과 북에서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있던 미군과 소련군. 그 경계선인 38선이 지금처럼 철옹성 같은 분단의 벽이 될 줄은 누가 알았던가. 바로 그처럼 이씨에게는 다시는 갈 수 없는 고향,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버지가 믿기지 않았다.
더욱 기구한 사연은 당시 군사분계선 이남에 있던 고향 옹진군이 6.25전쟁 후 휴전선 이북으로 바뀌면서 너무도 갑자기 고향을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1951년 당시 열일곱살이던 이입분씨는 이때까지만 해도 전쟁의 공포나 위협을 크게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대포소리가 쿵쿵 울리기 시작하면서 마을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국군이 퇴각한다’는 것이었다.
마을에서는 청년들을 모집해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느라 정신없었다. 당시 퇴각중인 군함에 올라가 본 이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지가 없는 사람, 피로 범벅이 된 사람, 죽은 사람...
이씨는 이때서야 ‘사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여기서 부상병을 위한 밥심부름을 하던 이씨가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은 집대로 발칵 뒤집혀 있었다.
국군의 후퇴와 함께 마을주민들도 내려가야 하며 떠나기 전에 골목골목에 지뢰를 묻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남녀 불문하고 웬만한 군사훈련을 받았던 터라 이씨도 다른 청년들과 함께 10리를 걸어나오며 지뢰를 묻었다. 이때 이씨는 탱크와 무기를 버리고 근처 산으로 퇴각한 어린군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울면서 무전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곧장 집으로 다시 달려온 이씨는 무작정 달렸다. 길에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고 가족들을 서로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고 앞뒤 분간할 수 없을만큼 연기가 자욱하게 길을 가로막았다.

이씨는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김양식을 많이 했던 당시에는 김쌀이 여기저기 꽃혀 있어서 그것을 잡고 숨어 있으며 살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바다속도 이미 국군과 민간인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얼마를 헤엄쳐 갔는지 떠나는 배에 간신히 올라탄 이씨는 동네아주머니와 할머니, 시동생들과 만나 인천까지 이르게 되었다.
당시 이씨는 지금의 남편 서정태씨와 약혼한 사이였다. 그러나 각자 어디로 흩어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다시 옹진으로 가자고 했지. 서울서 옹진까지 650리 길이니 다들 어떻게 거길 가겠냐고 말렸지만 다시 가기로 했어.”
걸으며 품을 팔며 몇날 몇일을 걸려 고향 옹진으로 돌아가는 길은 길이 아니라 시체무덤이었다. 임진강을 건너는 데도 강변이며, 강물이 모두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간신히 돌아왔으나 인민군이 장악한 곳에서 버티지 못한 이씨는 다시 피신을 나갔다가 10월경 인민군이 후퇴하고 국군이 들어왔다는 기별에 다시 옹진으로 돌아왔다.

이때 제주도로 피난갔던 약혼자 서정태씨를 만나 결혼했다. 불행중 다행이었다. 그리고 동짓날이 되어 국군이 후퇴하게 되자 또다시 피난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친정식구들은 다행히 다 내려왔지만 아버지 묘소는 이고 올 수 없었던 게 이씨의 큰 한이었다. 아버지는 이씨가 열두살되던 해 돌아가실 때까지 이씨를 아들삼아 자랑으로 여기고 사셨다고 한다.
연평도로 피난을 내려온 이씨부부는 이입분씨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당진으로 내려왔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객지에서 살기가 어땠겠어? 굴따서 장사하다 나중엔 반찬장사로 당진, 합덕, 면천, 틀모시, 예산, 천안 안간데 없이 다녔어. 그리고 밤엔 그 먼길을 걸어서 돌아왔지.”
억센 생활력과 담대하고 편안한 성격으로 새마을 부녀회장 맡기를 20년. 그러다 은수교회와 인연을 맺게되면서 회장직을 내놓고 신앙생활에도 열정을 다했다.
적어도 반신이 굳어져버리기 전인 3년전만해도 고향에 꼭 가야겠다는 신념도 변함이 없었다.
“그새 임진각에 몇번 갔었지. 하지만 거기서도 고향쪽은 보이질 않아.”

지금 서정태ㆍ이입분씨 부부의 고향 옹진에는 시아버지의 묘와 친정아버지 묘, 그리고 그때 피난오지 못한 시어머니와 시동생이 남겨져 있다.
“하느님 아버지...”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기도하겠다던 이입분씨는 ‘아버지’라는 대목에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살아생전에 고향에 다시 가보고 싶은 이입분씨의 소망은 지난 46년동안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가진 것 하나없이 8남매를 키우고, 20년간 새마을 부녀회장으로 사회에 봉사해온 억척스런 그였지만 이제야 간신히 회복된 이씨에게는 이제 고향을 찾을 희망마저 희미해져만 간다.
“아무래도 우리때엔 틀린 것 같애. 하지만 아버지 묘소를 꼭 한번 보고 싶어.”
아마도 이씨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을 이었으리라.
...그 아버지 무덤위에 엎드려 한번이라도 아버지 이름을 부르고 싶어...
추석을 맞는 이씨의 애틋한 소원에 명절 한자락이 쓸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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