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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구의 사람아 사람아-합덕읍 운산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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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그네 5일장의 발달, 공포리에 드나들던 장삿배들이 시장형성의 모태

버그네 5일장의 발달
공포리에 드나들던 장삿배들이
시장형성의 모태
합덕읍 운산리<2>

보부상!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고 하였다.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하게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와 같이 중앙집권의 통치하에서는 옛부터 길은 서울을 기점으로 지방도시로 이어 달리게 길을 뚫었다. 길이 생김으로 크고 작은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고 그 길을 따라 시장이나 저자거리가 자연스럽게 번창하고 발달되는 과정을 겪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모든 도로도 서구 여러나라와 같이 1번 2번하고 도로에 번호를 붙였다. 즉 남북으로 흐르는 도로는 홀수의 번호를 붙였고 동서로 달리는 도로는 짝수의 번호를 매겨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의 정기시장을 중심으로 행상으로 생산자와 소비자간에 경제적 교환을 매개하던 전문적인 시장상인들이 보부상들이었다. 봇짐장수, 등짐장수, 황아장수, 돌짐장수, 장돌뱅이, 장돌림, 장꾼등을 통틀어 보부상이라 하였다. 여기서 분류하면 봇짐장수와 황아장수는 보상이라 하였고, 등짐장수와 돌짐장수는 부상이라 하였고, 등짐장수와 돌짐장수는 싸서 이거나 들거나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장수들이다.
봇짐장수가 가지고 다니는 방물고리에는 조바위, 남바위, 염낭, 댕기, 가리마, 분통, 면빗, 얼레빗, 빗치개, 쪽집게, 연지함, 진옥깍지, 은조롱등 주로 안방에서 사용되는 각종 물건을 갖고다녔다.
등짐장수가 취급하는 중요한 물품은 다섯 종류였는데 즉 생선, 소금, 흙으로 빚은 각종그룻, 나무로 만든 각종 그릇, 그리고 가마솥같이 무쇠로 만든 생활용품등이다. 이 보부상들의 활동은 각지역의 거상(巨商)을 중심으로 물건들을 갖고 다녔다.
보상과 부상은 별개의 조직으로 성장하다가 고종 20년(1883)에 중앙에 혜상공국이 설치되고 보상과 부상이 합해져 군국아문에 부속되었다. 2년후에 혜상공국은 상리국으로 바뀌고 고종 31년에는 보상과 부상을 농상아문의 관할하에 두었다가 1897년에 황국협회로 이속되었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그조직이 소멸되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80여년전만 하여도 합덕을 비롯하여 당진군내에는 길다운 길이 없었다. 오지이며 낙후된 곳이었다. 북쪽으로는 바다에 걸려 더 갈곳이 막힌곳이며 서울로 통하는 길목도 아닌 곳이었다.
특히 합덕읍 운산리는 야산에 인가도 별로 없었던 지역으로 특히 남쪽 들판을 흐르는 삽교천(버그내)은 제방시설의 불비로 서해의 밀물때는 바닷물이 밀려들어와 곳곳에 수로가 생겨 앞뒤집 마실에도 거룻배가 없으면 다닐수 없을 정도로 지형적으로 악조건의 고장이었다.
1866년 병인양요의 중요원인중에 하나도 삽교천에 밀물이 들어 배가 자유로이 왕래 할수 있었다는데서 찾을수 있겠다. 중국 샹하이에 본거지를 두고 장사하던 유태계 독일인 오페르트가 큰 배를 타고 행담섬 앞바다에 정박을 하고 밀물때 작은배를 이용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와 고덕의 구만리 깊숙한 곳에서 배를 내려 덕산 가야산 기슭에 자리한 고종의 조부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친 큰사건이 발생하였다.
지금의 합덕읍 신리에는 천주교신리 공소가 옛그집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도 교통이 불편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니지 아니한 곳이며 관거에서 멀리 떨어져 관속들의 손이 미치지못하는 외딴 곳이며 아산만에서 작은배를 타고 쉽게 접근할수 있는 이점을 십분이용해 불란서 선교사들이 숨어서도 자유롭게 활동할수 있는 여건이 구비된 지점임으로 여기에 활동근거를 두고 선교를 하던 집이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여건에 놓였던 합덕읍 운산리가 오늘의 도시형태로 발전한 주된 원인은 1917년 합덕면사무소가 운산리에 사무소를 개설한 계기로 날로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21년에 합덕공립보통학교가 지금의 합덕초등학교에 개교를 보게 되었다.
1920년대초에 불란서 신부들이 현 구합덕성당을 건립하면서 들판에 많은 토지를 구입하였다. 이 토지를 경작하기 위해 당진군내는 물론 서산, 예산, 공주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합덕으로 모여들기 시작, 인구가 증가되는 주요원인을 만들게 된것이다.
우강면 공포리와 송악면 한진 포구에서는 부정기적으로 뱃길을 이용하여 인천이나 서울등지로 장사배가 드나들었으며 이 배편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하였다.
우강면 공포리에 장사배가 닿으면 많은 상인들이 물건을 팔고사며 성시를 이루웠고 주막집등 여러집들이 모여있었으니 일컬어 버그네장이라 불렀다.
이 버그네 장이 합덕면사무소가 운산리에 옮겨 앉으면서 장소를 지금의 합덕읍 운산리의 당진 삼거리로 이동하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소규모의 장이 서기 시작하더니 5일장으로 자리를 굳혀가면서 차차 번창 일로에 들어섰다. 그래서 합덕의 5일장을 버그네장이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버그네장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참고문헌
<시장의 사회사> 정승모저 웅진출판, <달레의 천주교회사> 달레저 분도출판, <구합덕 천주교회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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