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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구의 사람아 사람아-합덕읍 운산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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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덕시장의 초창기 예산 고덕등지의 장꾼들까지 모여들던 합덕 오일장

합덕시장의 초창기 예산 고덕등지의 장꾼들까지 모여들던 합덕 오일장
합덕읍 운산리<3>

합덕시장!
시장이란 수요와 공급에 따라 정해진 가격에 의해 사고 파는 사람간에 이루어지는 거래과정과 매매가 형성되는 장소를 말한다.
합덕시장은 5일장으로 1일과 6일로 지정되어있어 자동적으로 팔 사람들과 살 사람들이 장이라는 공간으로 모이게 된다. 본래 장날은 음력으로 1일과 6일로 정해졌었는데 일본인들이 1937년에 강제적으로 음력을 폐지하여 양력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장날은 시간과 공간의 일치를 통해 인간과 인간, 인간과 물자가 만나며 물건의 유통이 이루어지므로 합덕 5일장은 인근의 면뿐 아니라 예산, 고덕등지에서 장꾼들이 모여들어 중심지가 되었다.
장날은 농민들에게 있어 꼭 사야 할 물건이나 팔아야 할 물건이 없더라도 구경거리로 시장에 나오게 된다. 특히 50년대 이전에는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농촌에서 장날의 특징은 평소에 조용하던 농촌의 마을도 장날이 되면 이른 아침부터 활기를 띄게 된다. 장터로 이어지는 마을의 길들은 손이나 어깨, 머리위에, 또 지게에 곡식자루, 닭, 계란, 채소등을 이고 지고 나오는 농촌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장터에 나오면 새로운 물건을 접하게 되고 자주 못보던 친척과 친지를 만나 주막집에 마주 앉아 막걸리 잔을 주고 받으며 얘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그렇게 장터는 각 마을의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장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세상 돌아가는 소식과 도시의 유행도 장터에 모인 사람들의 귀와 입을 통해 시골 구석까지 퍼져나갔다.
그리고 혼담이 오고 가는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50대가 넘는 부부들은 장터를 통해 혼사가 이루어졌음을 흔히 볼 수 있다. 대개의 경우 혼주 양가의 거리는 불과 30~40리의 거리내에서 성혼되었으니 교통의 불편 등으로 형성되는 그 당시의 사회상인 것이다.
지금처럼 팔 목적으로만 생산을 하는 전문생산자와 판매자가 시장경제를 차지하게 되자 농민들이 시장에 들고 갈만한 품목은 가지수가 줄어들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운반수단인 지게, 망태, 짚신, 미투리, 모시, 삼베, 무명등을 들 수 있었다. 즉, 초창기의 장터에는 생활필수품의 거의다가 농가에서 생산하여 농민들의 손에 의해 시장화되었지만 기계로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된 후에는 채소등 농산물만을 주로 시장에 내다 팔게 된 것이다.
합덕은 1930년대에 이르러 규모를 갖춘 상점이 건축되어 문을 열게 되었다. 즉 예산삼거리와 당진삼거리에 이르는 도로를 따라 상가가 이어졌는데 지금의 농협합덕지소 자리에는 합덕 금융조합이 문을 열고 영업을 개시하였으며 그 앞으로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학용품 상회와 그밖에 20여 점포가 줄을 이어 장날과 관계없이 상설점포로 개점을 하고 있었다.
그중 화신상회(현 이태리안경원 자리)는 목조건물로 합덕에서는 현대적인 점포의 효시로써 유리제 진열장에 갖가지 양품등을 구비하였으니 그 당시 합덕의 명소로 등장했다. 화신상회의 주인은 우강면 강문리에서 5백여석의 농사를 짓는 지주인 하재흥씨가 건축하여 직영으로 운영하다가 제3자에게 임차하였다. 이 무렵 합덕에도 양방병원인 합덕의원(의사 신씨)이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다.
합덕의 5일장도 차츰 규모가 확장되어 많은 장꾼들이 드나들게 되니 번창하기 시작했다.
현재 합덕장목욕탕 앞쪽에는 운미소학교가 있었는데 이 학교는 일본인들의 자녀들만 통학하는 초등학교로 합덕, 순성, 면천, 우강등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자녀들과 일본인들에게 아첨하던 한국인의 부유층 자녀들도 다니게 되었는데 몇십명밖에 안되는 소규모의 학교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합덕중, 농고의 교사로 사용하게 된다.
합덕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영세상인들인 장꾼들은 서로 다른 개시일인 다른 장터를 따라 판로를 여러개의 시장에 의존하여 수입도 좋았으며 농민들에게는 집에서 키우는 몇마리의 닭이 낳는 계란을 매일같이 시장에 가서 팔만큼의 수량이 되지 못했으므로 농민의 생산규모는 이와 같이 5일 간격으로 열리는 장날 하나에만 의존하더라도 충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합덕 들판에서 생산하는 많은 쌀의 대량의 거래는 우강의 부리포를 통해 배로 인천, 서울등지로 운반되어 팔려 나갔으므로 들판의 대지주들은 주로 인천, 서울등지에서 거주하게 된 것이다.
합덕의 농가들은 주택에 비해 굴뚝을 웅장하고 크게 세웠음을 보게 되는데 연료로 논에서 생산되는 볏짚을 땔감으로 사용함으로 통풍이 잘 되라고 크게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고덕, 예산등지의 농민들은 땔감을 지게에 지고 합덕장으로 모여 들었는데 주로 솔가지를 다발로 묶어 팔았으며 때로는 소나무 장작을 달구지에 싣고 오는 농군들도 눈에 띄었던 것이다.
합덕시장은 1930년대부터 시장규모를 갖추고 형성되다가 3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인들이 중심지역의 토지를 매입해 우리상인들은 뒷전으로 밀렸고 큰 자본은 일인들이 장악하였기에 합덕상인들은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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