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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구의 사람아 사람아-합덕읍 운산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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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후의 합덕장 광복의 기쁨도 잠시, 미군정하 물가폭등으로 서민생활고 여전.

광복후의 합덕장 광복의 기쁨도 잠시, 미군정하 물가폭등으로 서민생활고 여전.
교통수단의 발달로 합덕장 기능 축소돼
합덕읍 운산리<5>

“어두움이 깊을수록 밝음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본인들의 전쟁노름으로 온 나라가 암흑속에 숨이 막혀 질식사하거나 혹은 아사직전에 놓였던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가 천지신명의 도움이었던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은 연합국에 항복을 하게 된다.
일본왕은 8월 15일 12시를 기해 항복하겠다는 방송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합덕에는 일본왕의 항복 방송을 들은 사람은 일본인과 친일하던 몇몇 사람외에는 방송을 들은 사람이 없어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방송을 들은 일본인들과 한국인 지주들은 일본왕의 방송의 진의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또 항복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리면 자기들이 큰 피해를 입을까 하여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암흑기에 숨통을 막고 살던 농민들이 광복을 맞아 장터로 밀려나와 활기가 가득했다. 장날이 따로 없고 매일매일 장날과 같이 사람이 붐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광복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합덕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연일 군중대회가 열렸고 시가행진을 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 일본인들에 강제로 징집되어 군인으로, 징용갔던 아들, 남편이 오는 것을 마중나온 농민들이 장터에서 기다리는등 장터는 연일 난장판을 이루는 큰 성시를 만들어냈다. 장터에는 일본이 전쟁하느라 몇년씩 구경도 못하던 상품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광목, 고무신, 밀가루, 설탕등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장꾼들의 눈을 어리둥절 하게 하였거니와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가재도구와 장식품등 없는 것이 없이 여러종류의 물품이 장터에서 팔려갔다.
광복후 미군정을 펴고있는 시기라 전국적인 치안이 불안정하였으며 사상적으로 좌·우익의 혼란상이 극도로 대립양상을 벌이고 있었던 시기라 민심은 흉흉하며, 서로간의 갈등이 심화하였다. 장에는 생필품의 부족현상으로 매일 매일 물가가 올라 천정부지의 인플레이션으로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장날에도 농산물외에 다른 생필품은 너무 값이 비싸 농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으로 변화되었다.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되면서 시장의 기능은 회복되는듯 하다가 50년 6.25전쟁으로 또 한번의 시장은 암흑기에 들어갔다. 4년동안의 전쟁때에는 시장은 있으나마나 농촌에서도 먹을 것을 걱정하며 괴로움을 당했고 장터에는 미군용품이 틈틈이 선을 보일 뿐 기타의 생필품은 구경도 못하였던 고난의 시기를 당하게 됐다.
“도시는 선이다”라는 말이 있다. 산업사회의 도시생활에는 보이는 선과 보이지 않는 선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전기와 상·하수도는 도시생활에 필수적인 선이며 도시가스선과 유선·무선의 전화선도 이미 없어서는 안될 선이 되어가고 있다. 요즈음에는 여기에 컴퓨터 등을 연결하는 통신망이 추가되고 있다. 그러나 인구이동과 관련된 중요한 도시의 선은 도로망이다. 도시의 도로는 도시인들이 매일 얼마나 빈번하게 이동하는 가를 한눈에 보여준다.
도시인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현실들을 이와같이 설명하는 것은 현대에 비해 지역간의 일상적인 인구이동이 거의 없었던 전통 농경사회의 농민들은 장나들이 이외는 이동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우리 농촌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려고 한 의도이다.
우리나라에는 전통적 유교이념을 국가운영의 기틀로 삼아온 이래 의도적으로 상인들을 천하게 여겼고 그들의 활동을 국가적 차원으로 억제하였다. 즉 상업적인 유통과정에서 얻어지는 이득은 진정한 생산활동의 결과가 아니라는 유교적인, 또는 농경사회적인 관념은 매우 뿌리깊어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도 남아있을 정도다.
신분제 사회인 전통사회에서는 왕족을 제외한 모든 백성을 양반과 상민 및 노예로 나누고 상민은 하는 일에 따라 농·공·상으로 나누어 상인을 가장 천하게 여겼다. 이러한 구분은 오늘날 자본주의 하에서도 은근하게 구별시하고 있으나 “돈이 양반이다”라고 할 정도로 변화된 것만은 사실이다.
요즈음 농촌시장은 전보다 기능이 약해져 가고 있으나 합덕의 장은 여전히 지역권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아직도 합덕읍 운산리에는 농협등 타 금융시설이 있고 초·중·고등학교등 교육시설과 병원, 약국등 각종 의료시설과 위생시설이 있고 읍사무소등 행정관청, 파출소, 우체국등 관공서 그리고 다방, 사진관, 양복점, 옷가게등 상설점포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농촌 사람들이 전과는 달리 시장 출입의 목적이 다양해질 수밖에 없는 농민들의 사정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며 꼭 필요한 것들이다.
도시에서만 필요로 했던 도로가 농촌에도 포장이 되어있으며 무엇보다 교통수단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까닭에 시장의 기능은 전보다 기능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시장의 기능과 오일장의 기능은 합덕읍 운산리에 오래오래 남아 있으면서 농촌사람들의 애환을 담고 함께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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