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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구의 사람아 사람아-우강면 송산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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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받고 풍요로운 땅! 우강

우강면 송산리 <1>
복받고 풍요로운 땅! 우강

우강면,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게 연출되는 곳, 우리들의 시각과 마음이 와닿는 곳이 우강면이다. 비록 우강면 뿐이랴! 그러나 넓은 뜰을 가슴에 보듬고 있는 곳, 우강면이다.
우강면 전체면적이 35,26km2
에 논이 26,54km2나 되는 넓은 풍요의 땅이며 복받은 곳이다. 봄에는 생명이 파릇파릇 자라며 숨쉬는 곳, 여름에는 벼이삭들이 푸릇푸릇하게 젊음의 왕성한 기의 내음을 풍기고, 가을에는 황금의 결실된 물결이 넘실거려 마음으로부터 풍요의 대합주곡을 연주하고 있는 곳이다. 겨울에 설경이 끝간데 없이 펼쳐져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어 대인으로 키워주는 곳이 우강이다.
들판 곳곳에 어깨를 마주하며 의로움과 평화로운 이들의 모여 사는 곳! 17개리에 7,785명(97년 12월 31일 현재)이 대를 이어 농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고향을, 그리고 흙을 지켜가며 사는 농부들이 일년간 쌀 생산량 1만6천톤을 기록하는 곳, 바로 오늘의 우강면의 현주소이다.
흙속에서 흙과 함께 사는 우강민들에게 평화롭고 화합하며 살고 있는 철학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미소를 보내세요. 당신의 아내에게, 당신의 남편에게, 당신의 아들에게, 서로에게 미소를 지으세요. 그가 누구든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미소는 당신에게 서로에 대한 더 깊은 사랑을 갖게 해줍니다.”(마더 테레사)
6.25전쟁 시기에 필자는 사병으로 육군 6사단에 배속되어 최전방에 전투요원으로 참전하던중 오른쪽 팔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밀양 27육군병원에 입원, 치료중이었다. 바로 옆의 병상에는 다리 한쪽을 잃은 전우가 있었는데 그는 중상을 입은 장애자였건만 밝고 명랑하면서 양어깨에 목발로 의지하면서도 다른 부상병들을 위로하고 격려를 서슴치 않았다. 그 병사의 끝맺음은 언제나 똑같은 얘기다.
“함께 있던 많은 전우들이 포탄에 맞아 전사를 했는데 나만 다리 한쪽을 잃고 살아났다. 그것은 내고향이 훌륭한 분이 탄생하였던 곳이어서 그 분의 은덕을 입은 것이다.”
그 사병의 고향이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라고 하면서 그곳에서 탄생하신 분이 김대건 신부라고 했다.
그 당시 필자도 모태신앙인으로 천주교를 믿기 20여년이 되었었지만 김대건 신부에 대한 내력은 아는 바가 없었다. 그 전우는 천주교 신자도 아니었으며 당시 1백여년이 지난 사항을 자세하게 설명하는데는 나 스스로 큰 상처와 양심에 자책을 받았었다.
제대후 서울서 생활하면서 적어도 1년에 한번쯤은 우강면 송산리 솔뫼에 김대건 신부의 생가를 찾아 참배하였고 많은 서적을 읽고 김대건 신부의 내력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후 천주교 당국에서 솔뫼를 성지로 지정하여 활발하게 재개발한 1983년도에 솔뫼성지에 근무하게 되고 만 10년간 개발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가 다만 우연이라고만 돌리기에는 아쉬움이 남겠고 밀양 육군병원에 한발을 잃은 전우의 얘기가 큰 고리를 맺게 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진시대 신문의 애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우강면 송산리에서 탄생하신 김대건 신부의 약력을 여기에 간추려 본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마을에서 태어났다. 김해김씨 안경공파의 후손으로 아버지 김제준과 어머니 고우슬라 사이에 태어났고 조부는 김택현이고 증조부는 김진후이다. 증조부 김진후는 면천 현감을 지낸 분으로 당시 남인계에 속했던 청렴결백한 관리로 가세는 어려웠으며 예산 신종리(여사울)에 살고 있던 중인출신 이존창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것이다. 천주교 박해로 관직을 박탈당했으며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해미감옥에서 10년을 옥살이 하다가 1816년에 옥사를 했다.
김진후의 아들이며 김대건의 조부인 김택현은 1827년 정해교난이 일어나 솔뫼에서 살 수 없어 고향을 등지고 낯선땅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솔가 이사하였다. 이때 김대건 신부의 나이 7세 때이다.
김대건 신부는 15세때에 프랑스 선교사에게 발탁되어 중국 마카오로 동료 2명과 함께 신부수업차 유학을 떠났다. 김대건 신부는 국가에서 정식으로 파견된 유학생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유학한 최초의 학생으로 기록에 남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마카오에서 신학·영어·프랑스어·중국어와 신학문인 과학·수학 등 6년간 수업을 받았다.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하이 근처 김가항에서 천주교 신부로 서품되었는데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신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수선탁덕(首先鐸德)이라 부르고 있다.
김대건 신부는 신부가 되어 고국으로 들어와 1846년 한국으로 프랑스 선교사를 영입하고자 육로는 삼엄한 경비에 어려움을 느껴 해상로를 개척하려 황해도 순위도에 갔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다. 관가에 체포돼 많은 고문을 받다가 1846년 9월 16일 서울 한강변 새남터에서 역적죄인의 죄명을 쓰고 군문효수형으로 순교를 한다. 그때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꽃도 피우지 못한 25세로 짧은 일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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