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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입력 2001.04.02 00:00
  • 호수 364

[금주의 당진역사]4월 첫째주(4월 1일~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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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보는 우리 역사
금주의 당진역사(唐津歷史)

4월 첫째주(4월 1일~7일)

◆1일 : 1914년 부령 제 11호로 당진군, 면천군을 통폐합하여 당진군이라 칭하였다. 그 군청은 당진군 이배면에 두었는데 면천군에 소속되었던 22면을 7개면으로, 당진군 10개 면을 3개면으로 통폐합해 이배, 고대, 석문, 마암, 송산, 순성, 범천, 합덕, 송악, 신평의 10면으로 개편하였다. 이 가운데 마암면이 1917년 면천면으로, 이배면은 1928년 당진면으로 범천면이 1942년 우강면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당진군지).

◆2일 : 1919년 당진군 합덕, 범천(泛川)의 양면에서는 금월 2일부터 시위운동이 시작하였고 또 연하여 면천, 순성의 양면에서도 금 3일부터 각 면, 각 리의 리민들이 모여서 저녁마다 산상에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부르며 밤을 새우는데 경부이하 관원의 노력으로 차차 평온되는 모양이라 한다(매일신보 1919년 4월10일).
◆당진군 합덕면 범근시에서는 4월2일 다수 군중이 만세를 고창하고 소요를 시작함으로 범근시 경찰주재소 순사와 합덕면장 김철호가 진력, 해산시키고 당진군수와 경찰서장이 출동하여 엄중 경계하였다(매일신보 1919년 4월13일).

◆3일 : 1919년 서산군 정미면 천의시에서는 4월4일 장날을 이용하여 군중 약 천여 명이 만세를 제창하고 시위폭행하여 면소와 천의시 경찰주재소 유리창을 파쇄하였다는 급보를 듣고 당진경찰서에서 순사를 파송하여 해산시키고 주모될 만한 대호지 면장 리인정과 동면 사성리 남주원을 체포하여 경찰서로 인치 취조중이라 한다(매일신보 1919년 4월13일).

◆5일 : 1919년 당진군 송악면 기지시에서는 4월5일 군중 약 수백 명이 만세를 높이 부르고 해산하였음으로 주모될만한 자 4명을 당지역 경찰서에서 체포 취조중인데 여자가 1명이요, 또 당진면, 면천면, 순성면, 송악면 방면에 밤이면 높은 산에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부름으로 군청과 경찰서원 일동이 주야 순회하여 엄중 경계중이라 한다(매일신보 1919년 4월13일).

◆6일 : 1937년 충남 서산군 정미면 천의시장 이춘(李春)여사(60)는 본면 정미학교 6학급 증축에 일금 300원을 사용하여 달라고 자진 희사하였으므로 일반은 칭송이 자자하다고 한다(조선일보 1937년 4월6일).



면천 학생운동에 이은 4월 만세운동 촉발

4월 첫주를 시작하는 당진의 역사는 일제시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만세운동으로 문을 연다.
3월1일 서울 탑골공원, 정재용(鄭在鎔, 경신중학교 졸업)의 만세선창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충남에서의 3·1운동으로는 3월3일 예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맨 처음이고 당진지역에서는 3월 10일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만세운동이 처음으로 보인다.
특히 대호지 만세운동은 면장을 중심으로 공무원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 의령 남씨를 중심으로 하는 유림과 천도교 관계 인물이 대거 참여하였고, 무엇보다 천의장날에 나온 대호지·정미지역의 민중이 1,000여명이나 참여하여 폭력시위를 전개함으로써 적극적이고도 대규모적인 만세운동으로 지방 3·1운동 전개의 대표적인 항쟁으로 꼽을 수 있겠다.
이로써 많은 분들이 옥고를 치렀고 심지어 사망하신 분도 계셨으나 이같은 애국충절의 의지는 지금까지도 후손들에게 커다란 정신적 기반이 되고 있다.

자료조사 : 김남석 (호서고 교사)
E-mail : nsk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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