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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21.04.19 10:53
  • 호수 1352

[기고] 한상덕 바른인성교육원장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
-아버지가 남긴 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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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좋고 인심 좋은 시골에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고생하며 학비를 조달해 지금은 대기업 과장이 된 아들은 부부에게 크나큰 자랑이었다. 시골에서 고생하지 말고 서울로 함께 가자는 아들 내외의 제안을 사양했지만, 언젠가 서울의 강남에 있는 아파트에서 아들 덕택에 호사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뿌듯해했다.

세월이 흘러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초상을 치르고 난 아들 내외는 아버지에게 또다시 간곡하게 함께 살자고 청하였다. 할멈도 떠나간 이제, 노인은 몇 날 생각하다가 결심했다. 그리고 가산을 정리한 돈을 아들 내외에게 주어 더 넓은 평수로 옮기게 했다. 그즈음 아들은 부장 승진을 앞두고 일이 많았고, 회사가 워낙 바쁘게 돌아가서 매일 새벽에 출근했다가 밤 12시가 넘어서야 퇴근하는 일이 몇 달이고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모처럼 일찍 퇴근해 돌아와 보니 외식하러 다녀온다는 아내의 메모만 놓인 채 집안이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가족을 기다리는 동안 냉장고에서 맥주를 찾아 마시고 있자니 현관 쪽이 시끌시끌해지며 나갔던 식구들이 들어왔다. 그러나 아내와 딸, 둘만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 아버지는?” “오잉? 아버님 집에 안 계셔? 어디 노인정이라도 가셔서 놀고 계신가?”

아들은 아버지가 들어오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서재의 책상 앞에 앉았다. 그때 아들은 책상 한편에서 정성 들여 접어놓은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볼펜으로 꾸~욱 꾹 눌러쓴 글씨…. 무슨 한이라도 맺힌 듯 종이가 찢어지도록 꾹꾹 눌러쓴 글씨는 아버지의 필적이 틀림없었다. “잘 있거라 3번아, 6번은 간다.”

아들은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햇볕이 잘 안 드는 방에는 이쪽 벽에서 저쪽 벽으로 빨랫줄이 처져 있었다. 빨랫줄에는 양말 세 켤레, 팬티 두 장과 러닝셔츠 두 벌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 것이었다. 방 한쪽에는 어린 딸이 쓰던 옷장이 놓여 있었다. 방구석에는 소반이 있었다. 소반 위에는 멸치볶음, 쇠고기 장조림, 신김치 등 뚜껑 덮인 보시기가 몇 개 올려 있었고, 마시다 남은 소주 반 병이 곁에 있었다.

‘아아, 아버지, 아들도 있고 며느리도 있고 손녀딸도 있는데, 아버지는 그동안 이 골방에서 홀로 식사를 하고 계셨던가요? 며느리도 있고 세탁기도 있는데 아버지는 속옷을 손수 빨고 이 방에서 말려 입고 계셨던가요?’ 아들은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자괴감에 눈물을 흘렸다. 날이 뿌옇게 밝아오자 아들은 파출소에 가서 아버지의 가출 신고를 하였다. 고향의 이장 어른에게도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행방은 찾을 길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술 한 잔에 애잔한 마음을 달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아버지의 친구라는 영감님이 아들을 불러 세웠다. “요즘 왜 김 영감이 안 보이네? 그리고 자넨 왜 그리 안색이 안 좋은가?” 아들은 약간 창피하긴 했지만 아버지께서 가출한 얘기를 간단히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유서가 되다시피 한 암호문을 그 영감님에게 내밀며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다.

“흐음, 자네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구? 이 사람아, 김 영감이 늘 얘기하곤 했지. 우리집에서는 며느리가 제일이고, 두 번째는 손녀딸이고, 3번은 아들이라고 했지. 4번은 강아지, 5번은 파출부라 했네. 그리고 김 영감 자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6번이라면서 한숨을 짓곤 하였지. 자네는 그렇게 쉬운 것도 풀지 못하나?” 아들은 선 자리에서 그만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필자가 노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드렸더니 노인들이 아주 재미있게 듣고 공감하셨다. 어떤 노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떤 노인들은 “저 이야기가 실제 현실”이라고 말씀하기도 했다. 또 어떤 분들은 옆에 계신 분에게 서로 “자네는 몇 번이야?”라고 묻기도 하셨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산업화, 도시화, 정보화 사회로 빠르게 변화해 왔다. 엄청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전통적 가족 개념과 구조도 해체되어 가고, 사회가 원자화, 파편화되어가고 있다. 그 흐름 속에서 가족 간의 소중한 마음의 세계와 가치마저 점차 허물어져 가는 세태를 보고 있노라면 안타깝고 서글퍼진다. 가족의 해체는 청소년 가출과 비행 및 각종 범죄를 야기해 사회 구성원 간의 화합과 안전을 위협한다.

가족들의 생계를 짊어지고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의 처진 어깨,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말없이 희생하는 어머니의 주름진 손, 부모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자녀들. 가정이 이렇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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