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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선 코너 90]어느 노인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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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선 코너 90
어느 노인의 교훈

십수년 된 이야기입니다. 남산의 여러 갈래 산줄기중 한 고개마루에 스무평 정도의 기와 올린 한옥에서 내외분이 늦게 둔 막내딸과 오붓하게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육순이 넘어 노인소릴 듣는 연세에 동네 반장일까지 하시고 있었습니다.
큰길에서 그댁까지 올라가는 300여미터의 골목길은 사람과 승용차가 겨우 비껴갈만 했습니다. 근처에서 세들어 살기에 항상 그 길로 출퇴근 했습니다.
사람 왕래가 잦은걸로 해선 상당히 깨끗한 골목이라는걸 이사올 때부터 느끼고 있었습니다. 흔히 보는 낙서하나 눈에 띄지 않고 돌출된 곳없이 단장이 잘되어 오가는데도 편안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이웃들에게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반장 할아버지 덕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생활속에서 훌륭한 봉사활동을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 한번 청소하시는 걸 뵈면 감사의 인사라도 드려야 되지 않을까 하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수십일이 지나도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시일이 흘러 기억이 사라질 때쯤 갑작스런일로 매우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는 일이 있었습니다. 비로소 희미한 가로등불 아래 골목길을 치우시는 그분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새벽 네시반이었습니다.
막상 빗질하시는 그분의 옆을 지날 때는 마음먹었던 인사말도 못드리고 그냥 목례를 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황당하게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작아지는지 하루종일 그 생각만하면 화끈 달아 올랐습니다. 그후에 알려진 선행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학교 담장 사이로 삐져나온 곁가지를 정리하고, 꼭 토요일 오전에는 근처 어린이 놀이터를 둘러보고 유리조각, 쇠붙이를 주어 모았습니다. 비가 오건 눈이 내리건 어김없이 제시간에 읍에서 나온 통지서, 회보를 돌렸습니다.
언젠가는 골목길 청소를 왜 꼭두새벽에 하시느냐고 여쭈었더니 “지나는 사람 불편할까봐”라는 짧은 대답 뿐이었습니다.
좋은 일도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기막힌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봉사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직업상 자주 내걸던 계도성 현수막도 거의 없앴습니다.
지금 그분은 이승에 안계십니다. 하지만 지금도 무얼한다고 납죽댈라치면 그분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아무리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고 자기홍보로 살아간다지만 마음속의 성인께서는 늘 빙긋이 웃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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