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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1.04.23 00:00
  • 호수 367

“내 손으로 가려운 데 긁고 내 발로 걷는 일이..." - 김덕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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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장애인의 날 특집

[마당]제21회 장애인의 날 특집

“내 손으로 가려운 데 긁고 내 발로 걷는 일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인 줄 아십니까?”

3년전 교통사고로 전신마비된 아들
대신 손발이 되어 살아가는 아버지 김덕성씨

“어느날 맞게 될 지 모르는 우리 자신의 모습,
장애인에게 벽 허물었으면…”

언덕위의 하얀 집.
당진읍 운학리 김덕성(58세) 이장님이 자신의 집을 이르는 말이다.
당진중학교 뒤로 이어진 소담한 동산. 간이 산책로를 따라가면 다다르는 곳이 이장님댁 뒷마당인데 그 동산 맨꼭대기에 아담하게 새 집이 들어앉았으니 언덕위의 하얀 집인 것이 사실이다.
한때 과수원이었다는 이곳은 딱 좋게 경사진 언덕배기에 지금은 탐스러운 매실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그리고 그 위로는 햇살 아래 진분홍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 바라보려면 눈이 시려울 지경이다.
당진읍내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만큼 한적하고 주변이 아름다운 곳이다. 게다가 이 집 거실에서는 커다란 유리문을 통해 당진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집주인들은 필시 마음이 밝은 사람들일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마음에 근심거리 뿐이니... 아무것도 예전같지 않아요. 전 같으면 벌써 마당에 밭 일궈서 채소랑 이것저것 심고 가꿨을 텐데 도무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조심스럽게 들어선 현관문 못지않게 조심스럽게 말문을 꺼냈는데 이장님은 밝은 표정 뒤에 숨겨놓은 속내를 이내 털어놓고 만다. 3년전 느닷없이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마비로 누워있는 큰아들 면수에게 온통 마음이 가있는 때문이었다.
면수(29세)씨는 건강에 남부러울 것이 없는 건장한 청년이었다. 오히려 또래친구들에 비해 활동력이 너무 왕성한 것이 걱정이라면 걱정일 정도였다.
아버지는 바지런한 성품에다 서글서글해서 마을사람들의 신임을 얻는 마을 이장이었고 어머니와 남동생 한수와 함께 다복한 가정을 꾸리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장난감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기를 좋아해서 두손 꼼짝않고 앉아있지를 못하던 그는 호서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도 어떻게 해서든 취업을 하려 했던 희한한 아이였다.
그렇게 수원의 어느 기업에 취직을 하고 5년쯤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뒤늦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공부가 하고 싶어져서 98년에는 수원에 있는 대학에 입학해 ‘열처리’를 공부하고 있었다.
면수씨가 사고를 당한 것은 1학년을 마쳐가던 그해 10월이었다. 자신의 보물 1호인 오토바이를 타고가다 음주후 도로를 무단 좌회전하던 차에 치인 것이다. 하필 그차는 보험에도 가입해 있지 않았다.
면수씨가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던 다섯달 반 동안 이장님네는 그동안 모아놓은 재산은 물론이고 온가족의 희망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장님은 그때 그 순간을 삶의 연속성이 끊겨버린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필름이 끊겨버린 거죠. 면수 그 녀석이 그날까지 살아온 것과 우리 가족이 그날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요.”
그때는 마침 이 언덕위의 집의 기초만 깔아놓았을 때이고 이장님이 의욕적으로 시작한 운학리 마을회관 공사도 마무리되기 전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손과 발이 되어 살기 시작한 그때부터 아버지의 자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대신 채워주었다. 새 집을 올리는 일도, 마을회관 공사를 마무리하는 일도, 심지어 생활비를 마련하는 일도 모두 남이 해 주었다. 갑작스런 불행 중에서도 이장님은 그 사실이 너무도 고맙다.
그로부터 3년째. 면수씨는 우리 몸의 가장 중심부와 연결된 5번 목뼈를 치명적으로 다쳐 목 아래부분인 온몸을 쓰지 못하게 된 1급 장애인이다. 얼굴, 그리고 의식만 성하다. 성한 정신으로 자신의 망가진 몸을 바라보고 느끼는 일이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아버지는 가슴이 메인다.
이 3년동안 아버지는 면수씨 곁을 뜨지 못한다. 자기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들의 손발이 되어주려면 한시도 그 곁을 뜰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 송순동(56세)씨도 마찬가지다. 매끼 식사를 떠먹이고, 한줌씩이나 되는 약을 빠지지 않게 챙겨 먹이고, 운동부족으로 몸이 썩어들어가지 않도록 하루 네 번 관절운동을 시키고, 양치질과 세수, 목욕을 시켜주어야 한다. 가려워도 긁지 못하는 아들, 제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아들, 대소변이 마려워도 제 힘으로 그일을 해결할 수 없는 아들, 특히 소변이 차면 역류해 사망할 지도 모르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 어머니 두사람은 항상 면수 곁에 있는다.
면수씨가 이렇게 되면서 이장님은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었다. 아무 일도 가질 수 없는 끝없는 위급상황이지만 한두 숟가락밖에 뜨지 못하는 아들에게는 특별한 영양제와 약들이 필요하다.
“처음엔 하도 괴로워서 그때 그냥 저세상으로 갔더라면....하고 생각도 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예요. 저 아이에게 하루라도 더 주고 싶어요. 아직은 자신의 상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지만... 의사선생님들 말씀이 그런 때라고 하더군요.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하지만 언젠가 면수가 일어설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믿고 그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걔가 이 좋은 동산을 휠체어를 타고 산책할 수 있도록 가꿔볼 생각이예요.”
이젠 다 커버려서 손 갈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스물아홉살의 아들. 이젠 웬만큼 살아 더 이상 별스런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중년의 삶. 하지만 아버지는 이 3년동안 평생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았다. 자신이 내딛는 걸음 하나, 무의식적으로 뻗는 손길들과 미세한 손짓 하나, 순간 순간을 이으며 동작하는 몸의 구석 구석. 이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생명의 활동임을, 살아있다는 강렬한 웅변임을 문득 문득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걸을 수 있는 일이,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얼마나 고맙고 기쁜 일인가.
그래도 아버지는 불현 듯 외로워진다. 누구도 다 알지못할 것 같은 자신과 가족들만의 슬픈 연대가 너무 쓸쓸하고 벅차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명랑하더니 차츰 친구들의 발길이 끊기고 외로움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아들, 망각 속에 파묻혀가는 아들이 무엇보다 마음 아프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런 일이 있을 줄. 아무도 나는 괜찮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만일 장애인을 본다면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될 수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나와 다를 게 뭐 있겠습니까?”

김태숙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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