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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1.05.21 00:00
  • 호수 371

교단없는 선생님 카네이션 받던 날 - 당진향교 원로위원 김준환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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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당진향교 원로위원 김준환 어르신

교단없는 선생님 카네이션 받던 날
13년간 교단없이 ‘살아있는’ 유학 강의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예수.
세계의 성인은 모두 지혜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제자를 사랑했다. 성인들이 걸었던 깨달음의 여정에는 늘 제자들이 함께 했다. 그 발자취 또한 제자들과의 문답을 통해 전해져 내려온다. 제자는 스승을 통해 다시 태어났고 스승은 제자를 통해 영원히 살고있다.
제자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보다도 높았다. 공자(孔子)는 수제자인 안자(顔子)가 서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을 때 “하늘이 나를 저버렸구나”라고 깊이 탄식했다. 사랑하는 제자가 자신의 도학을 펴지 못한 채 죽은 데 대한 애석함은 스승의 간장을 도려내고도 남았다. 제자들 또한 공자가 죽은 뒤 3년, 혹은 6년 동안 스승의 묘 곁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제자를 대하는 성인들의 태도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서로 다른 제자들에게 한가지 답을 하지 않았다. 근본은 한결같은 것이었으나 제자들이 가진 재능과 깨달음의 수준에 따라 스승의 말씀의 양상은 달랐다. 스승이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지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구하는 제자들, 제자를 통해 제가끔의 꽃을 피우는 지혜의 생동(生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스승의 가르침의 근본은 사랑과 자비와 진실과 의로움을 구하고 행하라는 것. 언제나 그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야인(野人)이었다. 이들은 대개 전제적이고 야만적이며 인권을 독점한 당대 소수귀족의 학교에서 신분을 보장받은 가운데 강의를 했던 것이 아니라 광장에서, 산상에서,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설파했다.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놓고 강의하던 ‘행단’(杏壇;은행나무 자리)은 이제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보편적인 뜻을 지니게 되었다.

5월15일 당진향교에서는 조촐하면서도 특별한 스승의 날이 있었다.
단 한번도 교단에 선 적이 없는 선생님과 단 한번도 그분을 학교에서 만난 일이 없는 학생들 사이에 마련된 날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의 만남이 우연적인 것이거나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닌 것은 결코 아니다.
비록 ‘향교’라는 비공식 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진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지만 이들의 만남은 특별할 뿐 아니라 깊다. 이 인연의 시점은 자그마치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속성반’ ‘단기반’이라는 이름 아래 몇 달만에 1기생을 배출하는 양적인 기준의 다른 사회교육과 달리 ‘당진향교 부녀경전반’은 단 하나의 동아리를 십몇년째 이어오고 있다. 물론 이 작은 모임에도 크고작은 부침들이 있어왔지만 시간이 흘러 학문도 깊어졌다.
향교에서는 벌써 12년째 수요일마다 부녀자들의 독송이 흘러나온다.
올해 스승의 날, 이곳에서 부녀유학도들의 카네이션을 받은 사람은 다름아니라 유도회(儒道會) 당진군지부의 전교를 지내고 지금은 원로위원으로 있는 김준환(74세) 어르신.
그리고 한결같이 온화한 얼굴에 연로한 스승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준 학생들은 성현의 가르침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으려고 당진군내 곳곳에서 먼길 마다않고 모여든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40대나 50대의 나이에 길게는 10년 넘게 어르신으로부터 유학을 배워온 터였다.
“연세가 깊으셔서 걱정이에요. 배울 것은 한이 없는데 세월이 야속해요. 선생님께서 오래 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고령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과 부지런함으로 경전을 연구하고 세상사를 관심있게 읽어 현재에 맞게 적절히 재해석해 주시는 선생님의 늙으심이 이들은 못내 마음 아프다.
당진향교의 전교를 지낸 바 있는 김준환 어르신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경전반 강의를 시작한 것은 막 환갑을 지나면서부터였다. 그즈음 유림 내부에서는 경전의 바른 이해와 전수가 중요한 과제로 이야기되어 이미 작고하신 신암 이병태 선생은 유림들을 모아놓고 경전연구에 들어갔다.
전직 경찰관이라는, ‘선비’의 이미지와 사뭇 다른 편견 속에서 묵묵히 연구에 참여하던 어르신은 어느 날 막힘없는 경전강독과 경전의 현대적인 해석, 대쪽같은 질문으로 신암선생의 주목을 받았다. 경찰에서 유림으로, 어쩌면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변화였지만 어려서 한학과 선비의 도리를 익힌 터라 막연한 생계 때문에 경찰에 몸담게 된 후에도 ‘털어서 먼지나지 않도록’ 자신을 모질게 닦아세웠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신암선생으로부터 소산(蘇山)이라는 호를 받은 어르신은 얼마 후 신암선생이 쓰러지자 동료유림들의 추대로 경전연구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어져오고 있는 남자경전반이 13년, 부녀반이 12년째 되는 것이다.
보수도, 그에 따르는 명예도 없이 13년동안이나 이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통제력, 즉 질서를 잃은 세파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그리고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유학은 공자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중국의 것은 아닙니다. 예와 인, 의는 공자께서 정리를 하신 것이지 그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니까요. 예는 일찍부터 세상을 다스려온 이치였고 그래서 우리를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렀습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예로써 다스리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예로써 모셨지요. 하지만 지금은 서로 자신의 본분과 도리를 모른 채 질서가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것을 제대로 지키면서 남의 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할텐데 우리의 전통적인 것이 중단되거나 조작된 상태에서 남의 것만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 주체성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우리의 기본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줄까 하는 것이 이분의 고민이다. 그러다 보니 경전연구 뿐만 아니라 신문과 방송을 보며 세상을 진단해 보고 가르침의 실례가 되는 것들을 찾는 일도 게을리 할 수가 없다.
옛 것, 고루한 것이라고 치부되기 십상인 유학 경전반이 이렇게 오래도록 유지되는 비결도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 현재라는 시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군자의 기상은 송백처럼 시들지 않는다고 했어요. 적과 싸워 적의 장수를 얻어도 그 신의는 뺏을 수 없다고 했듯이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내 사리사욕을 넘어서 행하며 그 결과로 빚어진 내 처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굳은 마음, 그것이 곧 군자의 표상이죠.”
가장 가깝게는 부부사이에서 대결과 이익보다 자신을 넘어서서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를 받쳐주려는’ 것이 곧 군자다움요, 군자다움이란 사랑함(仁)과 올바름(義)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인간으로서 행하여할 바른 길을 전해주고 학술과 지식을 가르쳐주며 의혹을 풀어줘서 인간답게 삶을 이룩하게 해주는 사람이다(師者는 所以傳道 授業 解惑者也). 따라서 제자는 배움을 싫어하지 않고 스승은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學不厭 敎不倦).
논어에 일러 군자는 가슴에 꽃을 달지 않는다 하였다. 그러나 오늘 그 꽃을 받는 것은 세상이 주는 영예를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가 되는 고락(苦樂)을 받는 것이다. 군사부일체라 하였으니 ‘스승을 존경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자식이 부모를 섬김과 같이’ 하려는 제자들의 마음을 존중할 따름이다.
김태숙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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