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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입력 2001.08.06 00:00
  • 호수 382

2001년 6월 1일자 중국 인민일보 기사 “당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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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인은 한민족 불굴의 정신으로 새로운 생활을 창조해가고 있었다
서울을 출발하여 서남쪽으로 차로 100여㎞ 가니 곧 충청남도 서북단의 당진에 도착하였다. 한국 친구인 이재정 사장이 말하기를 “당진은 옛 중국의 당나라 시대인 한국 신라시대 때 당진현이라 불렸다”고 한다. 당진의 “진”자는 한문 중에서 “나루터”의 뜻이며 신라시대 당시 중국 당나라와 잦은 교역이 있었던 항만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당진군이 보유하고 있는 역사 유물에서 오래 전부터 한·중 양국간의 교류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역사사실로 미루어 보아 당진군 주민들은 중국인들에 대해 옛부터 우호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년, 주한 중국대사관 간부들과 함께 이재정 사장과 당진문화원 민영근 원장의 협조로 개최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0주년 경축 사진전 개막식에 참석하였다. 경축 사진전에는 당진군수와 군의회의장, 교육장 등 각계 저명인사들이 참석하여 13만 당진군민의 주목을 끈 성대한 행사가 되었다.
특히 당진문화원의 민영근 원장은 독특하고 현대적이며 최신시설로 단장한 당진 문화원에서 사진전을 개최하여 사진전이 양국간 의미가 있고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성공적인 행사가 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하는 등 이번 행사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사진전 입구에는 여러 개의 중국식 홍색관 등을 걸어 놓았다. 개막식에는 케익 위에 큰 초 다섯개를 꽂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0주년을 상징하였다. 개막식에 참석한 모든 인사는 한·중 양국간의 우정과 교역의 발전을 축원하였다.
당진군의 각계 인사들은 모두 중국과 당진간의 경제·문화교류를 통해 많은 중국인들이 방문해 당진을 보다 더 이해하는 것을 희망하였다. 사진전 기간 중 고희가 넘으신 “한갑동”선생을 만났다. 그는 중국대사관 간부들이 당진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특별히 중국간부들을 충청남도 지정 문화유산인 자택으로 초청해 참과케 하였다. 그는 그가 소장하고 있는 목단모양이 새겨져 있는 청자를 중국대사관에 기증하였다. 그는 중국산 청자를 다시 중국으로 보냄으로써 보다 많은 중국인들과의 교역을 희망하였다.
당진은 한국 현대 역사상 반외래침략 운동, 전통문화와 민족정신의 보존을 중시하는 지방이었다. 당진군에는 “충장사”와 “4·4독립만세운동 기념탐”이 있다. “충장사”는 기원 755년 중국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남씨문중들의 역사가 기재되어 있는 당진군 남씨문중들의 사당이다. 그중 남씨 후예 12대와 13대손은 양세에 걸쳐 외래침략에 저항하다 장엄하게 순국하였다. 그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정부는 남씨문중 소재의 도이리를 민속보존촌으로 지정하였다. 당진군민 또한 “모충관”과 “충장정”을 특건하였다. “모충관”에는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유물을 진열해 놓있다. “충장정”에는 매일 군민들이 궁도연습을 하는 곳이다. 매년에 한 번 궁도 대회를 개최하여 선조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4·4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은 각각 길이 약 3m, 폭 약 2m인 화강암으로 된 한 쌍의 현대 조형물이다. 기념탐에는 1919년 4월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시의 정황이 기재되어 있다. 당시 당진군은 서울의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수많은 군민들이 거리로 나와 일본군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시위를 펼쳐 용감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당진군은 이런 애국지사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먼저 “창의사”를 건립하고 최근 다시 기념탑을 건축하였다. 오늘날까지 “창의사”에는 그 당시 순국하신 570여명의 애국지사들의 위패를 보존하고 있다.
오늘날의 당진인은 한민족 역사상 불굴의 투쟁정신을 계승해 나가며 보다 새로운 생활을 창조해가고 있다. 20세기 70~80년대 부터 대규모의 개선사업의 실시를 통해 대호방조제, 석문방조제 등을 건설하여 3,740여헥타르의 농경지와 공업지구를 개발하고, 당진군의 관광자원을 이용하여 관장지와 해수욕장을 건축하였다. 1994년 이후 당진군은 화력발전소를 건설해 현재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쾨근 아산만을 가로지르는 서해대교의 건설로 인해 서울과의 거리 차이를 대폭적으로 줄였다. 대교 위에 서서 해 저무는 노을 빛 아래 바라본 당진은 평온함과 생기를 품고 있었다. 상부상조의 미덕을 가진 아름다운 고장 당진은 희망과 행복이 가득한 곳이었다. 당진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아름다워지고 있다.

좧이 글은 작년과 올해 당진을 방문한 중국 인민일보의 왕림찬 기자가 인민일보를 통해 보도한 기사를 당진출신 이재성씨의 아들 이준용(중국 북경대학 4년)씨가 한글로 번역한 것입니다.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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