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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
  • 입력 2001.08.27 00:00
  • 호수 384

20년전 ‘왜목’ 표기 전에 긴세월 ‘왜메기’로 불린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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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마을 ‘왜’현상과 그로인한 잘록한 지형 이른 듯

150년전 족보에 남은 ‘와목’ 역시 ‘누운 목’으로
누운 자세의 목부분처럼 움푹 패인 지형 일렀을 것

왜목의 유래에 관한 잘못된 홍보
뉴 밀레니엄 해맞이 행사가 세상을 온통 떠들썩하게 했다. 마치 원단의 일출을 보기만 해도 신통력을 얻을 것처럼 야단이었다, 덩달아 왜목은 해맞이 장소로 각광을 받으며 전국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 유명세에 따라 지명의 유래에 대한 궁금증도 더해가는 듯했다.
그때쯤 어느 일간지는 ‘왜목’을 소개하면서 그 유래를 ‘왜가리목을 닮아 왜목’이라고 보도했다. 그때는 ‘재미있게 쓰기 위해 그랬겠거니’ 웃어넘겼는데 그로부터 얼마후 당진군에서 발행한 홍보물에도 역시 ‘왜가리목을 닮아 왜목’이라고 소개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지방도 아닌 우리 고장의 유래를 고증이나 확인도 없이 신문기사를 그대로 옮길 수는 없는 일 아니냐고 군청에 정정을 요구했다. 그리고 고증이 될 때까지는 유래에 관해 홍보지에서 삭제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후 유래에 관한 이야기를 홍보지에서 볼 수 없었으므로 약속을 지킨 공무원의 처사를 감사하게 여기긴 했지만 씁쓸한 뒷맛은 지금도 남아있다. 왜목에서 나고 살아 애틋한 정을 가지고 있던 터였지만 이때부터 왜목의 유래에 관한 나의 관심은 훨씬 적극적인 것이 되었다.

“왜목”이라는 이름에 담긴 한가지 진실
왜목마을의 본래 이름은 ‘왜메기’이다. 이곳은 오랫동안 왜메기라고 그저 불리우기만 했었다.
이 왜메기를 ‘왜목’으로 처음 기록한 것은 1981년 가을, 공무를 처리하는 이곳 기관의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였다.
왜목마을 앞바다는 선박을 정박하기에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었으나 남북이 대치된 당시 상황에서 해안경계의 중요성 때문에 정박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어선출입항 신고소”를 개설하게 되었는데 지명을 붙이는 게 문제였다. 이때 소장으로 추대된 민간인 이진섭씨와 관계자들은 “동네이름이 왜메기이니 간결하게 왜목으로 하자”는 필자의 의견에 만장일치로 동의해 ‘왜목어선출입항신고소”라는 이름이 붙여져 기록되었다.
이곳은 차츰 어선수가 늘어 민간인이 자율관장하는 신고소의 역할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1991년 8월 20일 태안해양경찰서로부터 경찰관 한명이 배치되어 옆마을 진골에 통제소가 세워졌는데 왜목이름을 그대로 옮겨와 “왜목선박출입항통제소”라는 현판을 내걸게 되었다. 이리하여 진골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왜목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소장 이진섭씨는 11년간의 봉사를 마치고 지금도 왜메기에서 살고 있다.
‘왜목’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우연적인 과정을 통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지명의 유래를 따질 때 우리가 기준으로 삼을 것은 왜목이 아니라 왜메기이다.

왜메기의 유래에 관한 세가지 설
왜메기의 유래에 대해서는 현재 대략 세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외길목으로 통과하는 길’의 줄임말로 외목이라고 불리웠다는 설이다. 둘째는 바닷가 논에서 일어나는 현상 중 집중호우 때 한꺼번에 물이 빠지면서 모래둑이 10미터정도 터져나가는 일이 있는데 이를 “왜터졌다”고 부르는 원리와 왜메기라는 지명이 관계있다는 설이다. 왜메기 마을앞에 있는 자그마한 들에서도 매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셋째로 큰나무가 누워있었지 않나 하는 추측으로 와목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왜메기에 해당하는 역사기록
왜메기에는 400년 넘게 이곳을 중심으로 거주해온 한양 조씨의 선산이 있다. 그리고 그 족보에는 150여년 전에 모신 묘소의 위치가 ‘와목동(臥木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왜메기’에 대해 문헌으로 남아있는 것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더구나 이 마을 나주 임씨의 족보에도 와목동(臥木洞)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왜목의 근본이 되는 왜메기는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리고 ‘와목동’은?

왜메기의 유래는 외목일까
먼저 외목이라는 첫 번째 설을 살펴보자.
국어사전에 ‘외목’은 표준어로서 외길목의 준말이라고 나와있다. 고서(족보)에 기록된 ‘와목’과도 글자나 발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언뜻 첫 번째 설이 일리가 있어보인다.
그러나 외목이 왜매기로 변천했다는 가설은 여러 면에서 타당성이 없다. 외목이 방언에 따라 왜메기가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표준어의 ‘외’는 우리고장에서 ‘에’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외상(外商)’을 ‘에상’으로, ‘외갓집(外家집)’을 ‘에갓집’으로, ‘외롭다’를 ‘에롭다’로 발음하기 때문에 이곳 지명이 외목이었다면 마땅히 에메기로 불렸을 것이다. 지금도 연세 많은 어르신들은 ‘외길목’을 ‘에질목’이라고 발음하시기 때문에 외목설을 긍정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한글을 언문이라 하여 천대하던 150년 전에 외길목이라는 뜻의 표준어 ‘외목’이 쓰였을지도 의문이다. 우리말은 해방 이후에야 활발하게 연구되고 다듬어져 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왜목과 와목의 뗄 수 없는 관계
두번째 설의 ‘왜’의 어원은 문헌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만 국어사전에 ‘왜뚝’(=둑)이라는 사투리 말이 있었고 겨레말사전에 ‘왜뚜리’(=큰물건)라는 말이 있었다.
이 ‘왜’는 왜메기와 전혀 관계가 없지는 않아보이나 수많은 둑, 그것도 모래둑이 있는 전국의 수많은 바닷가 마을 중에서 유독 왜 ‘왜목’의 이름에만 남아있는지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여기서 유일하게 문헌에 근거를 둔 ‘와목(臥木)’에 관한 세 번째 설로 넘어가 보자.
‘와목’을 직접 풀이하면 ‘누워있는 나무’다. 그러나 이 뜻을 직역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전라도의 ‘목포(木浦)’와 안면도의 ‘영목(嶺木)’의 경우와 같이 신체의 잘록한 ‘목’처럼 생긴 곳을 나무라는 뜻과 상관없이 소리나는 대로 옮겨적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두문자의 영향인데 지명이 쓰인 150년 전의 언어상황을 생각해보면 개연성이 충분하다.
알다시피 이두문자는 우리의 고유한 말에 걸맞는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에 관리들이 한자의 음과 뜻을 섞어 우리말에 접목시켜서 표기했던 글이다. 이두문자는 글자의 뜻과는 다르게 쓰이기가 일쑤였고 글자의 구성과 약속이 불규칙해 말과 글이 잘 부합되지 않는 문자다. <주1> 그러나 이두문자는 2세기경 한문이 이땅에 들어와 일반대중에 보급된 5세기 무렵으로 거슬러 무려 1,500년의 역사를 지녔고 따라서 우리 민족의 말과 생활에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점을 생각하면 비로소 지명에 관한 실마리가 조금씩 풀린다.

언어의 구조로 설명할 수 없는 예외적인 현상
말과 글이 잘 부합되지 않는 문자, 이곳저곳에 남아있는 이두문자의 잔재 때문에 최근까지도 학계는 비문이나 지명에서 언어의 구조적 원리로써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예외적 상황에 부닥치는 경우가 있다한다. 필자는 여기에 근거를 두고 왜목마을의 지명유래를 찾아보겠다.
그렇다면 150년 전 선조들이 표기했을 ‘와목(臥木)’의 ‘와’는 무엇을 나타낸 것일까?
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될 만큼 우리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역사는 길다. 그만큼 지명의 유서 또한 깊지 않을 수 없다.
이 ‘와’는 분명 ‘왜’와 관계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을현장에서 말의 근원을 찾아보았다. “왜”는 우리지방의 고유한 방언이라 생각하고 교로리와 인근부락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신 70세 이상되신 분들께 ‘왜’라는 말의 뜻을 조사하였다. <표1>
그 결과 주민들로부터 찾아낸 ‘왜’의 뜻이 세가지였으나 모두 물과 연관되고 물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일을 일컫고 있었다. 그중 ‘왜사리’는 지금도 중년층에서 가끔 쓰는 말인데 교로1리 장석순 옹의 “왜사리란 바닷물이 많이 나가는 것”이라는 풀이는 곱씹어볼 말이다.

‘왜’는 움푹 파인 지형을 일컫는 우리 방언
우리 고장은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하며 아산만은 세계적인 조석간만의 차로 물의 흐름이 대단히 빠를 뿐 아니라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하고 드넓은 간석지가 드러난다.
연중 조석을 살펴보면 보름에 한번씩 합삭관계에 의해 일어나는 조금(소조)과 사리(대조)가 있고 조금에는 보통조금과 박조금, 사리에는 족사리(반쪽사리)와 왜사리(아주 큰사리)가 있다.
한달에 한번은 족사리, 다음번은 왜사리로 번갈아 일어나는데 그 또한 왜사리 중에서도 두달에 한번씩 더 큰 왜사리가 번갈아 일어난다. 때문에 아주 큰 왜사리는 연중 5~6회 정도이고 또한 여름철에는 밀물이 많고 썰물이 덜 나가는데 비해 겨울철엔 밀물이 적고 썰물이 많이 나는 현상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춥지않은 가을이나 이른 봄에 물이 많이 나가는 아주 큰 왜사리는 2~3회에 불과하니 바닷가 주민들은 질좋고 많은 양의 어획을 위해 그 기회를 엿보았을 것이 자명하다.
따라서 이런 날을 축제일처럼 맞이했을 것이며 여기에 대한 특별한 이름이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왜사리’가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이처럼 물이 많이 나가는 상태를 ‘왜’로 표현했다면 <표1>에 있는 왜사리. 왜낳다, 왜터졌다는 말은 모두 어원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왜’는 탑세기(쓰레기), 낭알(벼랑), 포강(연못), 꼬마지(부스럼), 게타리(허리띠), 심서리(능숙한 일꾼)처럼 잘 쓰지 않거나 소멸되어 방언사전에도 남아있지 않은 말로서 “움푹 패인 듯한 모양”을 일컫는 우리지방의 방언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왜메기의 지형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산과 산 사이가 움푹 들어간 상태로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진 모양은 누가 보아도 흥미롭다.

배를 타고 보면 연상되는 누워있는 사람의 목
이렇듯 움푹 패인 지형 때문에 오래 전부터 왜메기라고 불러왔다면 150년 전 족보에 ‘와목(臥木)’이라고 기록된 것은 어찌된 일일까.
바다에서 배를 타고 왜목을 바라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 마을의 형세가 마치 누워있는 사람의 목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즉 ‘와목’(臥木)은 누워있다는 의미의 ‘와’(臥)와 턱과 가슴 사이의 굴곡진 ‘목’을 합쳐서 ‘사람이 누운 모습을 옆에서 보았을 때 목부분처럼 움푹 들어간 곳’임을 일컬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인체의 목과 같이 잘록한 지형을 일컬으면서 한자의 뜻과는 상관도 없이 소리나는 대로 목(木)이라고 쓴 것은 엉뚱하다고 생각되지만 이런 현상은 이두문자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왜메기의 “메기” 또한 “목”의 방언으로서 표준어와의 관계는 온(통)=엔(통), 온(갖)=엔(갖)처럼 (왜)목=(왜)멕=(왜)메기에서도 맥이 통한다. 이는 음성모음과 이중모음이 주축을 이루는 우리방언의 특징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여기서 해봐=예서 히ㅕ보ㅑ), (거기서 무엇해=계서 뭐혀), (저기가 어때=제가 워뜨ㅕ) 등 우리 고장의 방언은 음성모음과 이중모음이 주축을 이룬다. 그래서 우리 지방 방언은 어둡고, 크고, 둔하고, 느리고, 점잖게 들린다. 반대로 양성모음은 밝고, 작고, 날카롭고, 빠르고, 방정맞게 들린다.

와목과 왜메기는 한가지 지형에 대한 기록과 이름
“와목”(臥木)은 누운 사람의 목을 상징하여 표기한 글자이고, “왜메기”는 움푹 파여진 목을 부르는 이름이니 이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잘 부합되는 글과 말이다.
한편 국어사전에 수록된 낱말중 ‘와’자가 들어가는 낱말은 대부분 평화롭고 한가로우며 조용히 기다리는 순리적인 내용을 담고있다는 점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굳이 다르게 정리하자면 “누운 목”이라 할 수도 있다. “와목”은 누워있는 사람의 목과 같이 움푹 낮아져 가늘게 이어진 지형을 일컬었고, 독특한 우리고장의 방언 “왜메기”는 푹 파여 낮아진 목이라는 의미이니 ‘와목’과 ‘왜메기’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하나의 지형을 같은 시각으로 본 것이라 하겠다.
공교롭게도 “왜목”은 왜메기와 와목의 의미가 함축된 이름인 것이다.
왜목. 양쪽 산 사이로 낮은 능선(목)이 하늘과 맞닿은 아늑한 모양은 한가롭고 거기에는 그리움이 있다. 나를 기다리는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은 향수를 불러일으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참으로 독특한 지형이다.
배를 타고 왜목의 지형을 둘러보며 다시 한번 이런 생각을 해본다. “왜메기라는 이름의 유래는 왜터지는 목처럼 낮으며 누운 사람의 목처럼 가늘게 이어진 저 땅의 생김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왜터지는 낮은 목을 연상케 하는 땅의 모양, 그것이 바로 왜메기라고.

참고문헌

△國語辭典, 古語辭典(남광우 著, 一閣社 1993년 발행) △吏讀辭典(도서출판사 1991.9.10 발행) △韓國의 땅이름 辭典(한글학회 발행) △口訣文의 연구(김상대, 한신문화사 1993년 발행) △吏讀集成(정찬용, 삼문인쇄소 1994년 발행) △朝鮮館 譯語 연구(강신범 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5년 발행) △겨레말 용례사전(한글 문화연구원, 1996년 발행) △당진의 옛지도(김추윤 저, 당진문화원 1997년 발행) △潮汐表(교통부, 수로국 발행) △一般 海洋學(저자 리처드A. 데이비드.JR, 1976년 발행) △바다의 운동(저자 박용향, 1982년 발행), 漢陽趙氏 甲子譜 譜冊 등을 살펴보았다.
쭔<주1> 이두문자의 표현

예를 들면 “도라지”(질경-桔梗)를 이두문으로는 “道羅次”(도라차)로 한자의 음만 따서 표기한다. 여러해살이 풀로 콩과에 딸린 “쓴너삼”(우리 지방의 방언으로는 “느삼대”라고 함)을 국어사전에는 쓰다는 의미로 고삼(苦蔘)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두문으로는 한자 板麻(판마;널삼)의 뜻새김인 훈만 따서 “널”板 “삼”麻으로 표기해 널삼=너삼이라 기록했다.

살펴본 사람 : 조선형(왜목마을 관광단지 유치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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