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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1.09.17 00:00
  • 호수 387

꽁배로 시작해 풍물가락 50년 - 당진농악대 부상쇠 이은권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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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에 겨워 50년 시름 스리슬쩍 넘었지

“흥에 겨워 50년시름 스리슬쩍 넘었지”
한살 모자란 열여덟 살이라 간신히 징병을 면한 소년 이은권은 어르신네들 뒤를 따라 논매기 심부름하고 북이며 징이며 쇠를 나르는 ‘꽁배’로 1950년 한국전쟁기를 지냈다.
시름이 큰 세월이었지만 전쟁의 복판에서 논 한복판에서 어른들 따라 농요를 부르고 풍물가락에 소리를 맞추었다.

서서성 서서성 열두동네 돈 닷돈
상쇠잽이 똥쌌다 상쇠잽이 똥쌌다
달두 달두 밝두다 초생달두 밝두다
서서성 서서성 ..... .....

풍물꾼들을 부렸으니 노자와 먹을 것을 대주어야 하는데 상쇠잽이가 열두 동네를 다녀 얻은 것이라고는 돈이 닷돈밖에 없으니 상쇠잽이 애가 타다 못해 똥을 쌀 지경이라는 소리다. 풍물의 외박자는 이 소리에 맞춰 리듬을 냈다.
그렇게 논매기의 흥을 돋우는 동안 어느덧 전쟁의 시절도 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도 한 동네에서 징병나간 형뻘 되는 친구들은 더러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럴까. 아무것도 모르는 꽁배로 어른들 꽁무니 따라 다니느라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었건만 풍물과 소리의 신명 밑에는 차마 입에 담지못한 그 시절의 슬픔이 가라앉아 있었나보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는데도 이은권(68세) 어르신의 마음에는 오로지 그즈음 논매기때 풍경과 그 흥이 가장 센 기억이고 가장 가까운 기억이다.
“이끔덜이야 악기도 많고 가르쳐주마는 슨생도 많고 장소도 천진디 그땐 그런 기 워딨어? 그 무거운 징 깨진다고 우덜은 만지기나 헐 수 있어깐? 따로 우덜헌티 배워준 것두 아니구 ... 그러니 목 빼구 넘어다 보구선 흉내나 낸 기지.”
그때는 풍물 배우기가 더 쉬웠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냥 벌어지는 판이 있었을 뿐 따로 달리 가르친 것도, 배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생활과 함께 구전된 것이 우리의 풍물이었다.

풍물이 본시 그랬던 것처럼 어르신도 그저 있어서 하고, 좋아서 한 것이 풍물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 10여년 전에 어르신처럼 나이 지긋한 분들끼리 ‘당진농악대’를 만들었다. 당진에 풍물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논매기풍물이 사라지면서 젊은 사람들에게는 생활 가운데 풍물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여성풍물패를 이끄는 문선이씨나 학생지도를 하고 있는 이금돈씨, 농협부녀풍물패를 시작한 김진숙씨 같은 이들이 바로 이 원로들로부터 전수받은 1세대들이다. 물론 어르신들이 직접 부녀나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니까 당진농악대는 우리의 논매기풍물, 살아있는 풍물을 체험한 마지막 세대다. 나이가 많게는 80에 이르렀으면서도 이분들이 풍물을 놓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어떤 자각 이전에 본능같은 것이다. 본디 신명과 끼가 있어서 풍물에 손을 댄 것이요, 그것이 살아가는 일 자체였으므로 몸에 밴 것이요, 이제는 사라져버린 것이기에 남겨야 하는 것이다.
아직 젊다는 상쇠 김영수 어르신이 예순셋인가 넷인가 됐고 쇠납을 부는 김의석 어르신은 벌써 나이 여든에 이르셨다. 김병일, 윤병호, 이상세, 최종열 어르신들은 세상을 뜨셨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세상 뜬 동료들의 이름을 가만 가만 일러주시는 이은권 어르신은 장구 한가락처럼 가볍게 한소리 덧붙이신다. “사는 날꺼정 나두 허다 죽을껴.”
어르신 눈 속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감히 못볼 걸 보려고 덤빈 것 같아 민망하다. 어르신은 그냥 입가에 미소를 띠고 계셨던 것이다.

이은권 어르신이 사는 곳은 송악면 봉교리다. 동네에서는 그냥 ‘은권씨’ 하면 통한다.
한 집에서 오래 살기도 했고 그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풍물잽이로 산 탓이기도 하다. 소년시절부터 칠순을 앞둔 지금까지 살면서 제일 많이 한 일은 풍물을 두드린 일이다.

그냥 좋어. 좋어서 허다 보니께 이만큼 살었네. 허다 보니께 수월케 살었어.”
장정처럼 커다란 체구에 점잖아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 하지만 어르신은 아주머니가 찻상을 들여오기가 무섭게 한달음 나가시더니 소줏병 하나를 들고 들어오신다. 그러다 잠시 후 가락을 설명하시다 말고는 결국 북과 꽹과리를 갖고 오신다. 아마 몹시도 손이 근질거렸던 모양이었다. 옆에 앉아 계시던 아주머니께 잠시 북채를 넘겨주고 같이 장단도 맞춰보신다.
그런데 오늘이 처음이란다. 내외분이 함께 풍물을 맞잡은 날이. 그렇게 심하게 잔소리를 한 적은 없지만 바쁜 농사일 놔둔 채 ‘다녀와서 하마’고 대문을 나서는 남편이 아내 안영완(72세) 여사에게 고왔을 리 없다.
“그래도 있을 땐 잘 혀유.” 행여 남편이 흉잡힐까 그랬는지 그래도 남편을 두둔하는 풍물꾼 아내의 웃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아름답다. 오랜 세월 말하지 못한 아내의 섭섭함과 말하지 못한 남편의 미안함이 이렇게 녹기도 하리라.
“7채는 징이 일곱번 들어가서 7채라고 부르는디 웃다리 농악의 갠미가 여기 있지. 그런디 혹가다 젊은 사람덜이 몇박자를 건너뛰어. 그게 쉬웁기는 허겠지만서두 그건 웃다리가 아니지. 그게 아쉽다는 기지.”
어르신은 어렵기 짝이 없다는 웃다리 7채를 몇번이고 육성으로 들려주신다. 들으면 신이 나긴 나는데 글자로 적자니 당황스럽다. 헌데도 그저 신이 나신 어르신은 받아적는 기자의 어려움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갱무갱갱 갱무갱갱 갱무갱 갱무갱 갱무갱갱 갱갱 갱무갱 갱무갱갱”
나중엔 꽹과리까지 집어드시는 것이었다.

김태숙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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