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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읍면소식
  • 입력 2023.08.22 18:06
  • 수정 2023.08.24 13:32
  • 호수 1448

[우리마을 이야기 5] 대호지면 송전리
주민들의 정과 역사가 남아 있는 ‘고지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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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신 이양원·이시경 선생의 고향
마을 입구에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공덕비
상(喪) 당한 주민을 십시일반 도왔던 ‘연반계’

 

<편집자주>

당진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마을의 모습 또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미 없어진 마을이나 없어질 위기에 처한 마을, 또한 자연마을 중에서도 농촌 고령화로 인해 전통의 맥이 끊길 상황에 놓인 마을 등 기록해두지 않으면 금세 잊혀질지도 모르는 마을들이 존재한다. 마을의 전설과 옛 지명, 보호수를 비롯한 자연화경, 열녀문·효자비 등 다양한 마을의 이야기와 마을이 가진 자원을 발굴함으로써 지역주민들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마을의 이야기를 신문 지면과 유튜브 영상을 통해 기록한다. 

 

※ 이 기사는 2023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취재·보도합니다. 기사 내용은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1984년 11월 대호방조제가 완공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호지면 송전리에는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마중천이 송전리와 출포리를 거쳐 대호만으로 흘러들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으로 풍요로운 어장을 자랑했다. 마을 노인들이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에서 꽃게와 능쟁이, 바지락, 장어, 망둥이 등이 잡혔다. 다만 지금처럼 농경지가 많지 않았는제, 대호방조제가 막히면서 바닷물이 드나들던 곳을 간척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시냇물이 곧게 뻗어 ‘고지내’로 불려

대호지면 송전리는 본래 해미군 서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전촌리, 창리, 송천리, 정천리 일부를 병합해 ‘서산군 대호지면 송전리’가 됐다가 1957년 11월 대호지면이 정미면과 함께 당진군에 편입되면서 당진에 소속됐다. 

송전리는 주민들이 ‘고지내’라고 불러왔다. 마을을 지나는 마중천 시냇물이 곧게 뻗어 ‘곧은 내’에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송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 승선골은 바닷물이 들어오던 시절 배를 타던 곳이라 해서 승선(乘船)골이라는 설도 있고, 선녀가 목욕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승선샘이 있어 승선골로 불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밖에 모래가 많았던 모래굴, 찬 샘이 있던 참새골(찬샘골에서 변해 참새골이 됐다고 전해짐), 조선시대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던 창말을 비롯해, 닭골, 벌말, 절골, 불무골, 음산말 등 다양한 이름의 자연부락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지켜주는 400년 된 느티나무

송전리 마을 입구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그 모습이 장대하고 수려해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이자 마음의 안식처로 여겨진다. 1982년 10월에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며, 나무 높이는 30m, 둘레는 4m에 이른다.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말고도 ‘99번지 느티나무’로 불리는 고목이 하나 더 있다. 송전리 99번지에 위치한 느티나무로, 썩어서 가운데가 텅 비어 여러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다고. 그러나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단다. 주민들은 이 나무도 보호수로 지정돼 행정에서 관리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마을 입구에 위치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군청 직원이 ‘99번지 느티나무’와 착각해 이 나무 소재지를 송전리 99번지로 했다가 주민들의 항의로 최근 나무 소재지 주소를 ‘송전리 318-6’으로 수정한 팻말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이양원 사당과 이시경 정려 

느티나무(보호수)를 지나면 문헌공 이양원 선생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나온다. 이양원 선생은 조선시대 충청도·경기도·평안도 관찰사, 형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성품이 충후하고 박학했으며, 흑백의 논쟁에 치우치지 않았고 시문에도 매우 능했다 한다고 전해진다. 

 

이양원 선생의 셋째 아들인 이시경 선생은 정유재란 때 군공을 세웠으나 전사해, 이시경 선생의 충절을 기리며 1792년에 조정에서 충신 정려를 내렸다. ‘이시경 충신 정려’는 이양원 선생의 사당 앞에 세워져 있으며, 1993년에 당진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됐다. 

주민들에 따르면 이양원·이시경 선생의 전주 이씨 후손들이 송전리에 모여 살았으나, 지금은 집성촌은 거의 사라지고 각성받이 마을이 됐다고 한다. 

 

상 당한 주민을 위한 ‘연반계’

송전리에는 주민들이 상을 당했을 때를 대비해 함께 돕고자 ‘연반계’를 조직해 운영해왔다. 마을주민이 상을 당하면 연반계 회원들이 부고조, 발인조, 상여조, 가사조 등으로 나뉘어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했다. 윗말 연반계는 없어졌지만, 아랫말에서는 아직도 연반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현재는 장례식장 문화가 정착되면서 과거와 같이 연반계가 역할을 하진 않지만 마을 상조회 개념으로 유지되고 있다. 

한편 지난해 이장으로 부임한 윤석헌 이장은 최근 잃어버렸던 송전리의 역사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역할을 했다. 송전리 느티나무(보호수) 앞에 있던 해미현감 공적비와 옛 대호지면 3대 면장을 지낸 지동구 면장의 송덕비가 조금리 잔치회관 앞으로 옮겨졌었는데, 올해 비석을 마을 입구로 다시 되찾아왔다. 

 

윤 이장은 “면소재지에 세우면 면민들이 다 볼 수 있다며 두 공덕비를 조금리에 옮겨세웠는데 관리가 허술해 올해 비석을 마을로 다시 옮겨 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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