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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영웅, 어느 참전용사의 일기⑤] 김현기 옹 (정미면 사성리·93)
전쟁통 생사(生死) 오간 교통호에서 지낸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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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떠나보낸 어머니…아버지와 삼형제 어렵게 지내
군 생활 7년…“누가 살고 죽는 지조차 몰랐던 참혹한 시절”

 

<편집자주>

70년 전,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에 나가 목숨 바쳐 싸우고 고향으로 귀환한 당진의 참전유공자들. 1950년 전쟁 당시 스무 살 무렵이었던 참전용사들의 나이는 이제 아흔이 넘었다. 나라를 위해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들의 희생도 점점 잊히고 있다. 2500여 명이었던 당진 참전용사 중 2200여 명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생의 끝자락에서 회고하는 전쟁의 참상을 기사와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으로 제작한다.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당진시지회를 통해 추천받은 6명의 참전용사의 삶을 오는 11월까지 기록해 나갈 예정이다. 영상은 유튜브 ‘당진방송’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 미디어 지원 사업을 통해 취재·보도합니다.

정미면 사성리의 김현기 옹

 

정미면 사성리의 김현기 옹은 6.25 전쟁을 떠올리면서 이 말을 거듭 되풀이했다. 어두컴컴한 교통호(참호와 참호 사이를 안전하게 다닐수 있도록 판 구덩이)에서 먹고, 자고 생활한 기억은 70년이 지나도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좁고 낮은 그 구덩이 속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전쟁통에 수년을 지냈다. 오래 묵은 이야기를 꺼낸 김현기 옹은 “지금까지 살면서 전쟁 때 겪은 일을 자세하게 물어 봐 준 사람이 없었다”며 “나도 이제 다 까먹어 가는 이야기를 이렇게라도 물어봐 주니 고맙다”고 말했다.

일찍 떠나 보낸 어머니

김현기 옹은 대호지면 두산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11살이었고 이후 정미면 사성리로 넘어왔다. 남은 것은 아버지와 삼형제뿐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없어 아버지가 고생을 많이 했다”며 “한동안 큰집에서 살기도 했다”고 말했다. 

형편도 넉넉지 않아 김 옹도 10살이 되기 전부터 밭에 나가 일해야 했다. 학교에 나가기도 했지만 먹고 사는 게 우선인지라, 학교에 나간 것은 고작 며칠뿐이었다. 

스무 살에 전쟁 일어나 입대

군에 들어간 것은 스무 살이 갓 지나서였다. 6월에 전쟁이 발발하고 10월경 군에 입대했다. 처음 그가 간 곳은 군산 보충대였다. 멍석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소리에 손을 번쩍 들었고, 그렇게 보충대에서 지낸 20일 동안 멍석을 만들었다. 그리고 옮겨간 곳이 논산훈련소였다. 약 3개월 정도 논산훈련소에 머물면서 총 쏘는 법부터, 상대 군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훈련받았다. 그는 “훈련을 받다가 잘못하면 맞기도 했다”며 “기라고 하면 기고, 엎드리라고 하면 엎드리면서 3개월 동안 훈련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목숨 내놓고 전장 갔다”

“전쟁 터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때 뭐 생각이나 있었간유. 그냥 군산으로 가고 논산으로 가고. 전쟁터로 가는 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어요. 그저 갔다가 다시 이 길을 올 수 있느냐, 없느냐.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을 신고 있느냐, 신고 있지 않느냐 이 생각뿐이었지.”

논산훈련소에서 3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참전을 위해 배치된 자대는 강원도 양구였다. 그는 “목숨 내놓고 갔다”면서 “전장에 도착하니 어딘지조차 가늠 안 될 정도의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양구에 도착한 후 그는 교통호에 들어가 생활하기 시작했다. 땅 속을 오가면서 윗선의 지시를 받으며 움직였다. 동시에 심부름하는 연락병을 맡아 참호 사이를 오가며 지시를 전달하는 일도 했다. 그는 “양구에도 군대가 여럿 있으니 소대장들을 찾아 다니면서 지시를 전달했다”며 “자칫하면 눈에 먼저 띄어서 총 맞아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고 말했다.

“밥이 오지 않아 며칠씩 굶기도”

“연락병으로 다닐 때 인민군을 만났어요. 서로 거리가 멀다 보니 총을 쏜다고 해서 쉽게 맞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나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총을 쏠 수밖에 없었어요.”

교통호에서는 완전히 무장한 상태로 늘 긴장하며 지내야만 했다. 사람이 지낼 수 있도록 파 놓은 구덩이라고 해도 높이는 고작 어깨 정도였다. 길을 다니기 위해서는 늘 허리와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그곳에서 잠을 청하고, 밥을 먹고 살았다. 비가 많이 올 때면 지하가 물에 잠기기도 했다. 머리 하나 크기의 철모로 연신 물을 퍼낸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는 “거기가 내 집이라는 생각으로 지냈다”며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식량을 가져다주는 보급병들이 전쟁 중에 다치거나 죽으면 우리도 며칠씩 굶고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같이 양구 교통호에 들어간 사람이 수십 명이었어요. 하지만 나중에 보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부상 당하면 그냥 끄집어 갔어요. 후방으로 가거나 그랬겠죠.”

“소식 전하게 돼 반가워”

교통호에서는 휴전 소식도 바로 듣기 어려웠다. 뒤늦게 휴전 소식을 듣고 나서야 교통호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 그 후에 김 씨는 직업군인으로 생활했다. 휴전 후 후방인 김천보충대, 논산훈련소에서 잠시 지냈다고. 그렇게 7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나서야 고향 당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입대 하기 전 어른들의 중매로 한 여자와 혼담이 오갔지만 입대를 앞두고 있어 무작정 결혼할 수가 없었다고. 김 옹은 “군대에 입대하면 언제 제대할지 모른다”고 여자에게 전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끝내 그를 기다렸고, 아내가 돼 슬하에 세 자녀를 낳았다. 그는 “결혼하고 나서 농사 지으면서 자녀를 키웠다”며 “아들도 내가 고생한 거 다 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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