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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4.10.18 00:00
  • 호수 535

[28회상록문화제 주부백일장 대상작] 어머님의 마무리 길닦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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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바랄 것도 욕심도 없으셨던 어머니

가진 것 세상에 내려놓고...


 ‘이거 어머님이 막내며느리 주라던데..’
 아버님 제사에 다녀온 남편이 하얀 봉투를 불쑥 내밀었다. 의아한 눈으로 얼떨결에 봉투를 받아들고 슬며시 들여다보니 파란 배추잎 열장이 머리만 내밀고 있었다. ‘왠 돈?’ 반갑고 궁금한 마음에 얼른 물었다. ‘그냥, 이제 줄 것도 없고 기회도 없을 거라며...’ 남편은 말끝을 흐렸다.
 어머님은 올 오월에 유방암 말기 선고를 받으셨다. 연세 78에 미련도 즐거움도 많지 않으신 어머님이시지만 자식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이신 어머님은 초연한 모습으로 모든 치료를 거부하시며 당당히 받아들이셨다. 막 결혼해서 어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복은 체로 쳐도 안나간다. 좋은 일도 내복이려니, 나쁜 일도 내 복이려니 생각하고 가슴에 심지 품고 참고 살거다’ 이제껏 살면서 반은 그 말을 위안삼고, 반은 절감하며 살아왔다. 없는 살림에 아버님 젊으셔서 잃으시고 사남매 농사지으고 사시려니, 속이 속이셨을까. 그 삶에서 터득한 지혜이실게다.
 어머님은 남들과 얘기나누시는 걸 무척 좋아하신다. 길가던 사람이건 장사하시는 아줌마건 어려운 사돈이건, 붙잡고 늘어지면 기본이 한시간이시다.
 장사네 집안일이네 바쁘신 형님들은 늘 듣던 재방송이라며 슬며시 자리를 피하시지만 이제 시집온지 얼마안된 나 막내는 예의반 호기심 반으로 두세시간씩 잡담을 나눈다.
 세상에서 남에게 없어보이고 아쉬운 소리하는걸 제일 싫어하시는 어머님. 못살며 행여 집안에 손님이 식전에 오시면 없는 찬과 보리밥이 부끄러워 ‘아이구, 쬐끔만 일찍 오셨으면 같이 식사라도 했을텐데’ 얼버무리고 가실때까지 굶으실만큼 자존심 강하신 분이 당신건죄다 모아 일일이 자식들과 남들에게 나눠주신다. 행여 자식에게 해가 될까 놀러도 잘 안오시고 가끔 드리는 얼마 안되는 용돈도 과자 사먹으라며 아이들에게 되려 다 들려주신다. 시집 올 때도 밥숟갈 하나만 가지고 오라며 손을 저으셨다. ‘바리바리 싸와도 못사는 놈은 못살고 빈 광주리 옆에 끼고 와도 될 놈은 잘 산다’하시며 마음을 덜어주셨다.
 세상에서 바랄 것도 욕심도 없으셨던 그 어머님이 이제 마지막 길을 접으시려고 한다. 가진 것을 세상에 다 내려놓고...
 여름에 어머님은 가슴을 풀어 내게 보여주셨다. 어머님 가슴은 두개가 아닌 세개였다. 자식 먹여 키운 가슴 둘과 세상 나누고 보듬어 안은 멍울진 덩어리가 또 하나. 딱딱하게 굳어서 아이 주먹만한 어머님의 세번째 가슴을 만지면서 차마 눈물을 보이지 못하고 속으로 삼키며 돌아왔다.
 그렇게 의연하시던 어머님이 며칠 전 전화에서 투정을 부리셨다. ‘어머니, 많이 아프시죠’라는 말에 ‘그래, 쬐금 아프다’하시며 말끝을 흐리셨다. 자꾸만 세상구경이 하고 싶으시다는 어머니... 볼것도 보고싶은 것도 많은데 이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으신 어머니... 그 어머니께서 나에게 뭉칫돈 십만원을 보내셨다. 같이 보낸 세월이 적어서 막상 가실려고 하니 아쉬움이 많으신가 보다. 조금 더 산다해도 나은 건 없으신 걸 아시면서도 미처 더 주지 못함이 애닮으신가보다. 이제 그 아쉬움마저도 다 접고 나면 어머니의 마지막 길닦음은 끝이 나겠지요.
 들판에 곡식이 누렇게 익어 노란 바다를 이루고 코스모스가 소담스레 피어 마음을 달래주어도 내 눈에는 그 풍요로움보다 자꾸만 멀어지는 낙엽의 애절함이 더 가슴을 후벼판다.
 파아란 만원지폐 열장을 차곡이 개어 봉투에 담아 한곳에 모셔두고 꽃무늬 아련한 이쁜 편지지에 어머님께 편지를 썼다. 어머님 마지막 길닦음에 말동무 삼아...
 남편과 아이들이 모두 잠든 자정이 넘은 시각, 어머님 암선고 후 처음으로 몰래 목놓아 울었다. 어머님 외로운 마지막 길을 생각하며...
 ‘어머니, 가시는 길 제발 편히 가세요. 막내가 이렇게 빕니다.’ 세상에 길은 많지만 사람 사는 길은 다 색색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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