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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
  • 입력 1999.10.18 00:00
  • 호수 294

내게 말 걸어준 이는 모두 나의 은인 - 언어장애 딛고 이웃 돌보는 이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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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장애 딛고 소외된 이웃 돌보기까지

신평면사무소 근무 이한진



“내게 말 걸어준 이는 모두 나의 은인”



중학교때 교통사고로 6개월간 의식불명

극적으로 다시 산 제2의 인생 “이웃 위해”



신평면사무소에서 일하는 이한진(24세)씨를 만났다. 기능직 10등급의 말단 공무원으로 아침 7시에 나와 면사무소를 청소하고 직원들의 잔심부름을 해주는 게 그가 맡은 일이다. 면사무소에 전화를 걸면 간혹 생소한 음성이 들려올 때가 있다. 말 속도가 무척 느리고 낱말 하나하나를 간신히 이어 붙이는 사람. 수신자는 바로 이한진씨다.

이씨는 언어장애가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교통사고로 뇌를 다쳤던 영향 때문이다. 말투가 어눌하다 보니 어린아이 취급을 받기도 하고,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면박을 당할 때도 있지만 이씨는 ‘마음’이 없으면 누구도 하기 어려운 일을 묵묵히 해오고 있는 대견스러운 청년이다.

‘사랑의 열매’라는 모임이 있다. 50여명의 회원들이 내는 월 1만원의 회비로 의지할 사람없는 무의탁 어르신들이나 소년소녀가장, 복지원 등엘 주기적으로 찾아가 용돈을 주고 생필품을 전달해주고 있다. 난치병에 걸린 어린아이를 돕기도 하고 후원금이 들어올 때에는 어르신들을 온천으로 모시고 가 목욕을 시켜드리기도 한다.

이 모임을 만든 사람은 바로 이한진씨다. 꼬박 3년째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사랑의 열매’ 장부 안에는 그동안의 활동내용과 영수증, 월별 결산서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내 집 가게부를 써도 이렇게 꼼꼼하게 쓰진 못할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의 소산이었다. 주말과 휴일을 모조리 반납하고 5천원, 만원의 용돈을 드리기 위해 일일이 무의탁 어르신들을 찾아 뵙는 일, 명절을 앞두고 쇠고기 1근을 전해주기 위해 차 바퀴가 빠지는 줄도 모르고 가난한 이웃이 있는 산간 오지마을을 찾아가는 일. 그는 이런 일들을 쉼없이 해오고 있다.

스물네살, 남보다 좀더 화려하고 안락한 미래를 위해 땀 흘리고 적당히 소비의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할 시기에 그는 음지에 있는 이웃들을 챙기는 일에 남는 시간을 바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일은 이씨 혼자서만 하는 건 아니다. 때마다 차량을 대주는 명문학원 김태왕씨와 엄마손 어린이집 허용남씨도 든든한 후원자이다. 그가 어려운 이웃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그 스스로 소외받는 이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한달이 채 못돼 큰 교통사고로 뇌를 다쳤던 그는 6개월 동안 의식불명상태에 있다가 극적으로 깨어났다. 목숨은 건졌지만 반신마비 언어장애의 증상으로 집에서 1년을 쉬고 후배들과 함께 학교를 다녀야 했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는 개구진 후배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놀리는 후배를 붙잡으려 뛰어도 몸은 움직여주질 않았고 후배들은 그가 용돈을 풀 때만 그에게 다가왔다. 밤을 새워 공부를 해도 늘 제자리를 맴도는 성적, 소외의 아픔과 동시에 그는 자신이 정상인보다 두세배 노력해야 하는 숙제가 운명적으로 주어졌음을 알았다.

우선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목표였다. 의사소통을 위한 그의 피나는 노력이 시작됐다. 당진상고에 진학하면서 그는 절대로 버스를 타고 다니지 않았다. 지나가는 차량을 붙잡아 행선지를 묻고 방향이 같으면 태워달라는 부탁을 하고 운전자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대화를 하는 일, 즉 말하기 연습을 하기 위함이었다.

한번은 학교 선생님이 책을 발간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자청해서 책 세일즈에 나서 이틀만에 90권을 팔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지금처럼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 주위 사람들의 덕분이라고 했다. 간혹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를 그 사람들을 그는 자신의 말문을 트게 해준 고마운 분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신문배달을 하면서 재활용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리어커를 끌며 빈병, 폐휴지 등을 모아 마련한 돈은 150만원. 그 돈은 ‘사랑의 열매’의 자산으로 쓰여졌다.

2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사랑의 열매’가 50명으로 불어나기까지 그는 ‘사랑의 열매’를 알리기 위해 몇시간씩 공을 들였을 것이다. ‘네 살길 찾으라’는 부모님의 야단도 여전하지만 그는 사랑의 열매가 더욱 풍성해져 그늘 속에 남겨진 사람이 한명도 없게 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소외받는 이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물론 그 일중의 하나다. 기회가 닿으면 사회복지학 공부도 하고 싶단다.

그는 최근 새로운 장부를 하나 만들었다. 우리지역의 무의탁 노인들의 신상명세를 수록해 놓는 장부다. 사진, 이름, 생년월일, 가족관계, 연락처 등을 꼼꼼하게 적어놓았다. 여기엔 방문일지도 들어가 있다. 간결하게 적힌 일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 할머니, 방문일자:10월3일, 봉사내용:말벗이 돼줌.

그는 빈손으로도 무의탁 할머니를 찾아간다. 나누어 줄 물질이 없으면 그는 마음을 나누어 준다.
이명자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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