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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이 보는 당진 1] 베트남 신부 과탕향? 신평 아줌마 임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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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역할 베트남 식품점 운영
시장가서 한국말 배우기도

베트남 하노이 출신 과탕향(43) 씨가 한국에 처음 온 날, 하늘에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며 그녀를 반겼다. 베트남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눈이었다.

아름답고 신기했던 한국의 첫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너무 추운 탓에 그녀는 ‘이 나라에서 내가 잘 살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1998년 12월, 과탕향 씨가 임혜림이 되던 첫 날의 기억이다.

하노이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막내딸로 사랑받으며 자란 과탕향 씨가 남편을 따라 한국행을 선택했을 때 가족의 반대는 만만치 않았다.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가 반대하며 울던 모습이 생생하다.

 

한숨으로 지새우던 나날들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에 온 그는 신평면 도성리 산꼭대기에 있는 누추한 집에 둥지를 틀었다. 도시에서 살다 온 그녀에게 첫 보금자리는 너무도 암담했다.
1998년 당시 당진은 지금과 같이 도시화된 모습이 아니었다. 더 큰 세상을 꿈꾸며 한국을 왔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밤마다 한숨을 푹푹 쉬며 잠이 들었다.

 

시장가서 한국말 배워

베트남에서 2개월 남짓 배운 한국어는 고작 한글을 깨친 수준이었다. 한국에 들어와 보니 의사소통이라는 장벽이 두텁게 다가왔다. 더구나 주변에 집 한 채 없어 마을 주민들로부터 한국어를 배우기도 힘들었다. 한국말을 배우기위해 그녀가 선택한 것은 시장에 가는 것이었다. 첫 아이를 임신해 남산만한 배를 안고 시장 아주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서툴게 눈과 몸짓으로 대화하며 한국어를 익혔다.
“아줌마들은 가위를 가세라고 하고 베개를 ‘벼개’라고 했어요. 알아듣느라고 참 힘들었죠.”

 

베트남 식품점 사랑방으로

한국에서 잘 살라던 엄마의 말이 잊혀질 무렵 그는 이명휘 형사를 만나게 됐다. 이명휘 형사가 외국인 사건을 담당하면서 오래 된 이주여성을 찾다가 임혜림 씨를 알게 됐고 그 때부터 연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 형사는 그녀에게 서산법원, 대전법원, 경찰서를 동행하며 통역을 부탁했다. 맛있는 것도 사주고 좋은 곳을 구경시켜주면서 이 형사는 과탕향 씨에게 “이제 사회 나가서 활동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그녀에게 삶의 새로운 시작이 됐다.

그가 사회로 나오기 위해 많은 고민끝에 선택한 것은 베트남 식품점이었다. 시내를 돌아다녀도 중국식품점만 있고 베트남식품점은 없었다. 그래서 작게나마 베트남 식품점을 차렸고 올해 4년째 운영하고 있다. 쌀국수, 조미료, 라면 등 베트남과 관련된 식품을 판매하고 있다.
“돈 벌고 싶어서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베트남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서 시작했죠. 당진뿐만 아니라 안산 등 멀리서도 이곳에 와요.”

베트남 사람들의 사랑방인 식품점을 운영하며 재밌는 일도 있었다. 한글에 미숙한 베트남 친구들이 와서 “누나! 개떡이 진짜 개를 죽여서 만든 떡이야?”, “누나! 누나! 사장님이 나보고 배 먹으라고 하는데 어떻게 내 배를 먹어?”라고 말하기도 한다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웃으며 한국말을 알려준다. 베트남 식품점은 베트남 식구들의 사랑방이자 한국어 공부방이 되기도 한다.

 

못 떠날 것 같은 당진

한국에 처음 와 15년을 내리 당진에서만 산 그는 다시 태어나면 한국에 오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사는 이곳 당진에 대한 애착은 너무도 깊다. 다시 태어나면 오고 싶지 않은 한국이지만 이 나라를 떠나기 전까지는 당진에서만 살고 싶단다.

“당진은 저에게 인연이에요. 아마 여기서 못 떠날 것 같아요. 이미 이곳에 적응한 거겠죠?”
1998년 당시 한국어학원도, 프로그램도 없어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때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그녀에게는 한이 됐다.

“한국말만 제대로 배웠으면 지금보다 발음도 훨씬 좋아졌을거예요. 그럼 우리 아이들 공부도 잘 시켜줬을 텐데… 마음이 아프죠.”

그녀는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아이를 낳았다. 그녀가 한국말도 서툴던 때였다. 한국어가 서툰 엄마에게서 아이가 한국말을 능숙하게 배우기란 어려운 일이였다. 그는 이 문제가 이주여성들에게 가장 힘든 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주여성과 외국인들을 위해 다양한 한국어 교육도 이뤄지고 있다. 또한 전과 달리 편견을 버리고 외국인인 그녀를 친절하게 반겨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는 “특히 은행이나 병원 같은 곳에 가면 요즘은 친절하게 잘해준다”고 말했다.

15년 동안 살면서 전국 곳곳을 다니기도 했지만 당진의 물가는 유독 비싸다고 그녀는 볼멘소리를 했다. 또한 당진에는 그녀가 누릴 수 있는 쇼핑·음식·여가 시설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베트남 하노이 신부 과탕향에서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신평 아줌마 임혜림 씨는 15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제 한국사람, 아니 당진사람이 다됐다. 이제는 베트남에 놀러가도 김치 맛을 그리워할 정도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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