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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 입력 2016.01.22 19:02
  • 호수 1093

[종교칼럼]신합덕천주교회 김문수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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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담장을 뛰어 넘어야 할 자비의 실천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 ‘자비’ 역시 우리의 담장을 뛰어 넘어야 한다. 2014년 한국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을 ‘자비의 특별 희년’으로 선포했다.

‘희년’은 말 그대로 ‘기쁜 한해’를 의미하며 ‘죄의 용서 및 해방’이라는 종교적인 색채를 갖는다. 자세히 설명하면 50년째를 맞이하게 될 때마다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그 해의 모든 소출을 몸 붙여 사는 종들과 어려운 처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몫이 돌아가도록 하는 규정이다.

참으로 이상적인 규정이나, 지금까지 이러한 규정이 실현된 역사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교황은 소외되고 억압받는 현실을 직시하고 사람들에게 참다운 ‘자비’가 필요한 시대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들어왔던 ‘자비’는 불교의 가르침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같은 의미로 알아듣는다. 성경에서도 자비라는 말은 수없이 등장한다. 조계종 향적 스님은 불교에서의 자비를 이렇게 이야기 했다. “불교 세계는 ‘지혜’와 ‘자비’로 나뉜다. 지혜가 기도, 참선하는 수행이라면, 자비는 진실한 우정, 선의, 인정, 동료애, 화합 모두를 아우르는 실천이다. 수행만 있고 실천이 없으면 종교라 할 수 없다. 자비(慈悲)는 나의 기쁨은 상대에게 주고, 상대의 슬픔은 나에게 가져와 함께 나누는 것이다. 신앙인은 봉사, 환원, 중생 구제의 자비를 꾸준히 실천해야 한다”라고.

성경에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그리고 “여러분은 모두 생각을 같이하고 서로 동정하고 형제처럼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겸손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3.8) 라고 자비를 베풀 것을 권고하고 있다.

국제사회와 우리 현실을 보면 참으로 일부 ‘무자비한 세상’의 단면을 보게 된다. 극단주의 종교가 빚어낸 비극이 그렇고 북녘의 갈라진 형제들을 책임져야 하는 그는 끄떡하면 무자비한 맛을 보여주겠다고 폭언을 일삼는다. 요즘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아동학대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무자비함은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한다. 마당에서 뛰놀고 부모 앞에서 응석을 부려야 할 때인데 아빠와 갈라선 엄마와 함께 살면서 양육비 걱정에 우울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부모의 단 꿀을 다 빨아먹고 연로하여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어르신들을 나몰라라 하면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철없는 객지의 자녀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정의와 자비’는 우리 현실에 꼭 실현돼야 할 과제다. 정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준다는 의미다. 따라서 정의는 국가와 사회에만 그 임무를 맡겨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서 그 책임을 회피해서 될 일이 아니다. 정의는 모든 시민이 그 곤혹스럽고 소외된 상황에 꼭 필요한 것을 베푸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자비가 더욱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종교를 가진 모든 시민은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자비’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자비를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하고 오래 살 것이다. 무자비한 사람은 그를 맹종하는 사람만이 박수를 치겠지만, ‘신의 자비’를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복 될 것이다. 이제 내 집 담장을 뛰어 넘어 자비를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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