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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
  • 입력 1997.03.31 00:00
  • 호수 168

바른지역언론연대 공동기획-모범 자치단체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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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연소 기초단체장 김두관 남해군수

“관치행정경험 없을수록 좋다” 구시대 잔재걷고 자치행정 새이정표 세워
‘군수실 벽면을 유리로’ 공개행정구현
촌지근절등 ‘관’과 ‘언론’ 바른관계정립

바른지역언론연대는 민선지방자치단체장 후반기에 접어들어 전국에서 시민운동출신으로 개혁적인 지방자치 행정을 펴는등 바람직한 기초자치단체장을 약 10명정도 예정으로 엄선하여 그 실천내용을 매월 1회 공동보도함으로 올바른 지자제 실현에 기여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경남 남해군의 군수실은 입구쪽 벽면이 유리로 되어있다. 민원인들이나 직원들이 군수실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콘크리트 벽을 허물어 내고 유리벽을 설치했다. 이는 김두관 군수(40세)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공개한다는 의미에만 그치지 않고 자치행정을 주민들에게 전면적으로 공개한다는 그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95년 6월 27일을 경남 남해군민들은 잊지 못한다. 집권여당 안방에서 겨우 38살밖에 안 된 무소속 김두관이라는 젊은이가 행정경험을 자랑하는 통영시장출신의 여당 공천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초대 민선군수가 되는 대파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국 최연소 단체장이라는 기록까지 세우게 된 김두관 남해군수는 출마당시 지역에서 발행되는 남해신문 발행인이라는 것과 농민운동가라는 특이한 이력 때문에 단번에 전국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행정경험이라고는 한번도 없는 사회운동가 출신 단체장이 이끄는 지난 1년 8개월 동안의 경남 남해군의 자치행정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가? 김두관 남해군수는 “관치행정의 경험은 없으면 없을수록 좋다”고 주장한다. 비행정가 출신 단체장이 경험 많은 행정가 출신 단체장보다 지방자치제도를 더욱 잘 적응시키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김두관 남해군수의 이력
먼저 남해군 주민들의 정서와 정치지형, 그리고 김두관 군수가 어떻게 주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는지 알아야 독자들의 전반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김두관 군수는 군 복무를 마친후인 80년대 중반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 가입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된 늦깍이였다. 86년 「민주헌법쟁취 충북도민 궐기대회」에 가담했다가 집시법위반 혐의로 구속돼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집행유예로 풀려나기까지 3개월동안 김군수는 ‘농촌에는 운동가가 없다’는 생각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민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마을주민들은 이장직을 맡겼다. 이장일을 보면서 당시 고향에서 민주세력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야당인사들과 함께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농군으로 남은 선후배들과 함께 남해농민회를 조직하고 사무국장이 돼 87년 8월 민주화대투쟁을 넘겼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88년 4월 26일 치러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중의 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그는 3천여표를 얻는데 그쳤지만 31살짜리 젊은이가 유세장에서 토해내는 속시원한 연설은 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저 젊은이가 뭔가 될 인물이구나’라는 생각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다시 농민운동으로 돌아온 그는 한겨레신문의 창간과 충남 홍성에서 홍성신문이 창간되자 이에 영향을 받아 남해에도 영세농어민들의 처지를 대변할 매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그는 민중의 당이 자동 해산되자 주축이 됐던 인물들과 함께 89년 후반기부터 지역신문을 준비하기 시작해 91년 5월 10일 ‘남해신문’을 창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단체장 선거에 나서기까지 그는 오로지 남해신문을 성장시키기 위해 직접 신문을 배달하는등 1인 3역을 담당하면서 철저하게 영세농어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동안 성실하고 깨끗하고 능력있는 젊은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알게 모르게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대변자로, 민주세력의 대표자로 주민들은 생각하게 됐다. 고향으로 돌아온지 9년만에 주민들은 그를 ‘남해군 자치호’의 선장으로 결정한 것이다.

■참신한 개혁행정은 역시 젊은 군수가

- 관사 헐고 주민 쉼터로
김군수는 취임하자마자 대표적인 구시대적 잔재들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자치행정의 새 이정표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비좁은 군청사 안에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던 군수관사를 철거하고 이 터를 민원인 주차장으로 활용토록 했다. 임명군수에게는 꼭 필요하지만 민선군수에게는 무용지물인 군수관사를 철거하자 주민들은 크게 환영했다.
또 군청담과 맞닿아 있던 민가를 매입해 군청담을 완전히 없애고 ‘느티나무 쉼터’라는 주민 문화휴식공간을 만들어 군청사를 24시간 완전 개방했다. 당시 김군수는 “공직사회 내부에 깊숙이 배어있는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주민과 행정관청 사이에 쳐 놓았던 높은 군청 담벼락을 헐어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 쉼터에서 지역문화축제인 「화전문화제」 때 주민들이 마련한 ‘열린음악회’가 열리기도 했다.

- ‘관’과 ‘언론’ 바른 관계정립
“행정에 대해 폭넓은 취재를 통해 비판하면서 가능한 대안도 함께 제시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입니다. 언론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으면서 언론외 영역까지 침범하는 것은 자치발전에 이롭지 않습니다. 이제는 언론도 자치시대에 맞게 옷을 갈아 입어야 합니다.”
지역신문 발행인 출신답게 그의 언론관은 확고하다. 남해신문 발행인을 맡아오면서 그동안 수없이 많은 지방일간신문 주재기자들의 좋지 못한 관행을 보아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는 주재기자실의 폐해를 잘 알고 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군수와 경남ㆍ부산권 지방일간지 주재기자들과의 전쟁, 그가 요구한 것은 언론과 관의 관계를 정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에 따른 실천조치로 공무원이 기자에게 촌지를 주지 말 것, 군 예산으로 언론사마다 일정액씩 지급해오던 주민계도용 신문구독료 지급중지와 예산전액 주민사업에 전환, 군청내 주재기자실을 없애고 하루 두차례 정례 브리핑제 시행등의 조치를 내렸다. 약점없는 사람이 아니면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조치를 취하자 전국의 자체단체들 사이에 큰 호응을 받았다.
물론 곧이어 9개 언론사들의 조적적이고 강력한 반격이 상당기간 뒤따랐다. 김군수의 이같은 조치를 ‘언론탄압이다’는 관점하에 연일 무려 3백여건의 비판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선거법 위반혐의로 공판이 진행중이던 김군수에 대해 언론들은 노골적으로 도중하차시키라고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주재기자들이 남해군의회에 강력한 압력을 넣어 김군수가 공약했던 좧남해 2000기획단좩 설치조례와 직제개편안 승인이 보류되고 김군수와 의회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김군수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내년 선거에서 두고보자는 식으로 벼르고 있는 언론사들이기 때문에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것이지만 현재 상황으론 김군수의 판정승이다.
김군수는 선거법 위반 1심에서 벌금 2백만원을 선고받았지만 주민들이 항소심 판결에 앞서 ‘김군수 살리기 운동’에 나서 3만명 서명탄원서를 제출,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아 지방일간신문사들의 바램은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김군수는 언론사들과의 전쟁을 통해 공직사회 내부의 촌지수수(일명 떡값) 관행을 근절시키는 효과도 거둬었다. 공직사회 부패척결은 그가 내세운 가장 큰 공약중에 하나이다.

- 부실행정 부실공사 척결에 온 힘
‘촌지수수 척결’로 시작된 언론사에 대한 굽힘없는 그의 투쟁은 토목건축업자와 인허가 관련 공무원 사이에 만연해 있는 온갖 부정들을 척결하겠다는 의지로 받아 들여졌다.
모든 공사현장에는 공사에 관련한 모든 사항들을 공사표지판에 표시하도록 했다. 또 주민감독제를 도입해 현지 주민들이 공사를 감독하도록 했다. 이 제도의 핵심은 주민들에게 공사를 감독하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는데 있다. 주민들이 감독을 하고 싶어도 몰라서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준공검사를 할 때도 주민감독관이 입회하도록 했다. 한번 부실공사를 한 업체는 군이 발주하는 공사에 참가를 제한하는 불이익을 주도록 했다. 이런 제도를 도입했다고 해서 부실공사가 완전히 추방된 것은 아니지만 관행적인 부실공사는 상당히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김군수는 부패척결을 위해 자체감사를 통해 비리가 밝혀진 류아무개 과장을 고발조치하는등 단호한 의지로 ‘부실시공없는 남해’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주민제일주의의 사고가 체질화되지 못한 공직자들로 인해 집단민원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민원은 주민동의절차를 소홀히 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자치시대가 아직 공무원들의 자세를 완전하게 바꾸지는 못했다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 민원공개법정 민원해결 모범답안
민원공개법정은 남해군이 개발한 민원해결제도이다. 남해군은 이 제도릍 통해 해결하기 힘든 민원 2건을 손쉽게 해결했다.
유명한 남해 금산 마을버스 운행권을 놓고 3업자가 한치도 양보없는 경쟁을 벌였다. 업자와 업자의 변론인이 자신이 운행권을 따야하는 이유를 배심원들 앞에 설명하도록 하고 배심원들은 이들의 설명과 자료, 객관적인 평가자료를 가지고 점수를 매기는 방법이다. 이해당사자인 민원인이 직접 결정과정에 참여하고 공개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로비를 할 필요도 없고 결과에도 깨끗이 승복하는 모습이 연출됐다.
양식업자들의 첨예한 이해가 걸린 어장변경계획도 이 제도로 순조롭게 조정할 수 있었다. 그동안 행정에 대한 주민들의 최대불만은 공정한 룰에 의한 정당한 경쟁을 제한당했을 때인데 민원공개법정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로 실증된 셈이다.
이 제도가 알려지자 각 자치단체들의 문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제도는 핌피(편의시설은 내 앞마당에)민원에는 효과가 입증됐지만 님비(혐오시설은 내 뒷마당에도 절대 안돼)민원에는 입증되지는 않았다.



■2환경과 사람의 조화 좧남해그린플랜좩 세워
김군수는 앞으로 누가 군수가 되더라도 고치지 않고 추진할 ‘남해군 장기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김군수의 정책자문기구인 남해 2000기획단이 이 일을 맡고 있다. 2000기획단에는 농어민, 경영행정, 관광개발, 복지환경 4개 분과위원회를 두고 각 부분별로 전문가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21세기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해 나가고 있다.
김군수는 97년 예산안 편성에 따른 군의회 시정연설에서 ‘21세기 남해군 그린플랜’을 밝혔다. 그 내용은 남해공설운동장 잔디화를 성공함으로써 군내 초등학교 운동장 잔디화사업, 초가집형 미니별장사업을 포함하여 앞으로 남해군이 추진하는 모든 정책사업에 ‘그린’개념을 기조로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자연환경과 사람이 조화를 이룬 푸른남해 건설을 목표로 내세웠다.
김군수가 서둘러 그린플랜을 내세운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인근 하동군 갈사간척지에 현대그룹이 제철소를 짓겠다고 덤볐기 때문이다. 김군수는 즉각 이를 군민들에게 알리고 군민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현대그룹과 중앙정부, 경남도, 하동군을 상대로 철회투쟁에 돌입했다. 군민들과 함께 현대그룹 본사 항의방문 때도 그는 앞장서 구호를 외쳤다. 결국 통상산업부는 현대의 제철산업 진출 불허결정을 내렸다. 이 투쟁을 벌이는 동안 남해군민들은 삽시간에 인근 광양제철과 여천공단 때문에 죽어가는 광양만을 살리는 것이 남해군의 생존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됐다.
이어 남해군은 97년초 남해군 환경조례를 제정하고 군민환경위원회를 만들어 상시적인 환경보전활동을 펼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남해군 자치행정의 한계와 앞날
남해군 행정공무원들은 초기 김군수가 강력히 추진하는 개혁적인 행정조치들을 받아들이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뚝심과 소신 하나로 밀고 나가는 김군수와 이에 반발하는 기존 기득권 세력 사이에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선거법의 족쇄가 풀리고 일간신문과의 전쟁을 치르면서도 한치도 양보없이 대다수 주민편에 서서 행정을 펼쳐 나가는 김군수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군수는 1년만에 확실하게 공직사회를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공직사회 내부의 결속도도 매우 높아 보인다.
김군수는 취임후 참신하고 획기적인 행정 아이디어들을 많이 생산해냈다. 사계절 관광축제, 예술승강장, 남해군 이미지 특색화(CIP)사업등 다른 자치단체보다 앞서 개발해 낸 정책들도 많다.
김군수는 최연소 군수로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후원하고 싶어하는 전국의 다양한 전문가 집단들의 정책제안들을 행정에 접목시켜 냈다. 심지어 한 독일교포는 명예 남해군민이 되고 싶어했다. 그는 다양한 독일의 선진 자치사례들을 김군수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전문가 집단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들이 현실화되어 주민들 앞에 나타날 땐 주민들은 그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놀라면서도 그 과정에 대해서는 어리둥절해 하는 양상도 드러냈던 게 사실이다. 분명 주민들에게 이로운 정책이나 사업도 주민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이해가 이루어진 다음 일을 추진할 인내가 필요한데 인내가 부족했던 측면도 없었던 게 아니다.
남해군의 자치행정을 모델로 삼을 때 자치단체장의 성향과 역량이 지방자치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행정경험이 없어도 훌륭한 자치단체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입증됐다. 오히려 사고가 열려 있는 젊고 참신한 인물일수록 지방자치에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김군수는 “자치단체장을 꿈꾸는 수많은 젊은세대를 위해, 그리고 사회운동가 출신으로서 더 잘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항상 명심하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군수는 현재의 지방자치는 제도적인, 법적인, 그리고 재정적인 한계가 너무 많다고 주장했다. 결국 김군수의 자치행정도 제도와 법, 재정적인 한계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도의 개선방향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진주신문ㆍ남해신문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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