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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지역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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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지역감정

지난 4.13총선에서 우리는 골깊은 지역감정의 슬픈 망령이 이래선 안된다고 몸부림친 시대적 요구에 가한 카리스마적 폭행을 보았다. 그리하여 우리시대에 선거는 뿌리 깊은 지역주의의 대결구도가 표면적 숫자로 떠오르는 도구로 전락한 상황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 역사를 계속하였다. 지역감정은 우리 인간이 가지는 원초적 본능인가 보다.

당진군은 어떤가. 당진읍·합덕읍들이 나름대로 다른 냄새를 피우려고 애쓰며 보이지 않는 대결의식에 기름을 붓는다. 다른 면 지역도 물론 마찬가지다. 우습지도 않은 것은 웃말, 아랫말, 샛터, 깔판 등 같은 리의 지호지간 거리인데도 미묘한 지역감정의 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한탄스런 일이다.

희생과 사랑, 은혜와 경건을 표방하는 종계 교계는 어떨까. 부끄럽게도 그런 양상이 가장 심하게 자행되는 곳이 종교계요, 기독교이다(감리교는 한술 더 뜬다).

어느 신학교 출신이냐를 따라 모여 자기들 입맛만을 돋구는 일들을 생산해내고 꾸며댄다. 같은 학교라면 누구라인이냐로 또다시 갈라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을 가른다. 반드시 혁파되어야 할 망령인 것이다. 통곡하고 자복해야 할 일아 아니고 그 무엇이랴.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도 지역감정의 높다란 벽 앞에 늘 서셔야 했다. 예수가 사셨던 갈릴리 나사렛은 그 이름이 지도에 나타날까 말까 하는 오지벽촌이었던 것이다. 그런 곳도 있었느냐는 물음이 자주 질문되던 곳. 거기서 무슨 인물이 나올 수 있으며 그곳 출신이라니 오죽하겠느냐는 멸시와 푸대접이 주님 식탁의 단골메뉴였다.

당시 종교 중심지 예수살렘에서 거드름을 피우던 각종 직책의 종교지도자, 전문가들과 그들의 교법이나 율법에 깊이 길들여진 겉신앙 주민들에게 예수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나사렛 촌뜨기’일 뿐이었다.

역사적으로 유대민족의 선민의식은 타 민족을 개보다도 못하게 생각하는 이방인 취급을 하는 종교적 우월주의에 깊이 젖어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타 민족으로부터 심한 반발과 미움을 사게 되었고 히틀러 같은 독재자의 폭력적 잔인성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동족임에도 변두리 지역, 시골 어촌출신이라는 이유로 예수는 모욕적 푸대접을 받다가 끝내 위선자들의 시기, 질투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 처형을 받는다. 그리고 ‘이 변두리 시골어촌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하는 파행적 지역주의 명제는 지금 우리시대에 뚜렷하게 실증되고 있다.

너무나 크고 치명적인 아이러니는 그렇게 해서는 아니되고 할 수도 없어야 할 일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현장에서 은혜와 경건의 소외는 더 드높기만 하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지역감정이나 종교적 시기 질투의 기득권자들에 대한 복수 대신 죽음을 택하시는 사랑을 베풀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은 폭력 때문에 망한다는 사실을 인간 역사에서 배우도록 그들을 역사교실에 입실시켰다. 지역주의자들이 그것 때문에 망할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을 강의하시기 위해 또다시 조용히 십자가 위에 오르시는 것이다.

지금도 농어촌을 처형하는 도시주의나 가정 분위기의 중소교회를 처형하는 큰 교회주의, 교권·술수를 능력으로 포장하는 값싼 상업주의는 교회를 기업으로, 목사를 사장·회장의 회전의자에 앉힌다.

지금 우린 눈물고인 눈으로 이런 21세기적 타락을 극복하기 위해 비아돌로로사 눈물길을 걸어 다시 십자가를 지시려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크게 회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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