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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0.10.02 00:00
  • 호수 340

초로의 나이에 1급 사회복지사 - 신평은수감리교회 김중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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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눈을 사회로”
“교회는 교인들만을 위한 외딴 섬이 아닙니다”

초로의 나이에 1급 사회복지사
노인위해 사회복지관도 지어

신평은수감리교회 김 중 회 담임목사

이 마을에 차디찬 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었나 보다.
신평면 한정리(寒井里). 생명을 키우기 위해 많은 물이 필요한 봄에서 가을까지, 우물에서 길어올린 물이 차갑기까지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시원함으로 목마름만이 아니라 답답함과 더위도 씻을 수 있었으리라.
이 마을 한정리에 은수교회가 있다. 차가운 우물에서 길어올린 은혜로운 물. 지명에 어울린 교회이름이 그만이다.


은수교회의 김중회(59세)목사는 이곳에서 담임을 맡은 지 17년째다. 교회 뒤로 붙어있는 아주 조그만 사택이 그간 4남매를 키우며 살아온 집이다. 방 두 칸이 간신히 들어설 정도의 넓이를 교회높이에 맞춰 2층으로 올린 게 전부다.
그곳에 요즘 낯선 건물 하나가 들어섰다. 은수교회 부설 사회복지관이다. 아담한 방 세 칸과 거실, 조그만 공연이나 잔치도 할 수 있는 넓은 마루방에 주방을 두루 갖췄다. 예쁜 벽지와 분홍색 건물외벽이 화사해 보이고, 크게 창을 만들어 채광이 좋은 건물이다.
이 복지관은 농촌마을의 노인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마땅히 기거할 곳이 없거나 돌봐줄 사람 없이 혼자 버려진 노인들, 말년을 비참하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노인들을 위해 교회와 교인들이 주머니를 털었다.
여유없이 빠듯하기가 매일반인 시골자락에서, 더구나 교인도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거금을 들인다는 것에 반대가 없을 리 없었다. 하지만 지난 9월 새로 지은 복지관에서 가까운 다른 동네 노인들까지 1백분이 넘는 어르신들을 모셔다 경로잔치를 열었을 때에는 모두 손발 아픈 줄 모르고 뿌듯해했다.
시골마을에서 영세한 교회를 운영하며 감히 ‘겁나서’ 하지 못하던 일을 김중회 목사가 덜컥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이 일이 비단 노인들만이 아니라 교인들 자신을 위해서도, 또 사회를 위해서도 최선이라는 생각이 아무래도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회 전체, 한사람에게 있어서도 인성 전체를 건강하게 보살피는 곳입니다. 교회는 결코 교인들을 위한 잔치만을 열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너나 할 것 없이 교회를 교인들만을 위한 ‘외딴 섬’으로 잘못 여기고 있어요. 교회는 외딴 섬이 아니에요. 오히려 세상 안으로 자꾸만 문을 열면서 들어가야 합니다. 진정으로 교회와 신앙인이 할 일들을 찾아서 말입니다.”
복지관 건립은 교회의 눈을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로 돌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신앙의 뜻에 걸맞는 일이다.
당분간 이 복지관은 손수 숙식을 해결할 정도로 거동할 수 있는 노인에게 우선 개방할 생각이다. 바쁜 농촌에서 상주할 자원봉사 인력이나 유급봉사자를 두기는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끔 교인들이 거들 수 있는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여유없는 상황에서도 은수교회의 사회복지관에는 남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김중회 목사 자신에게 있다.
김목사는 지난 해에 몸소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땄다. 일을 하더라도 제대로 알고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초로의 나이에 평택대학교 대학원의 2년 6개월 과정을 지난해에 마쳤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시간상으로도, 건강상으로도, 경제사정으로도 어디 하나 넉넉한 부분이 없었다. 더구나 당진 광역단위의 감리사도 맡고 있었고, 서산·당진쪽의 인권선교 위원회 회장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농촌목회를 하면서 보아온 노인들의 소외된 현실, 그에 대한 긴 고민이 바로 길이 되어주었다.
길은 열렸고, 아마도 길은 계속 열려갈 것이다.


김중회 목사는 요즘 여러 면에서 종교의 현실을 다시 음미해 보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신앙이 자신의 영혼과 삶을 전체적으로 다듬고 가꾸는 과정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있을 때에 잠깐씩 매달리는 기복적 요소를 너무 많이 지니게 된 것이다. 그일이 해결되면 그만 사람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한치의 정신적 진보도 없이.
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회 전체를 정화하고 사회전체의 정신과 문화를 바르고 깨끗하게 이끌어가는 역할 대신 마치 사회의 여러 톱니바퀴의 하나처럼 기능화되어 버린 것 같다.
“비록 배는 고파도 한 말씀 듣고 영혼과 정신이 배부른 것을 갈구하는 것” 그것이 김 목사는 아쉽고 그립다.
김 목사는 아이들 낳고 직장생활을 하다 나이 사십줄로 접어든 후에야 신학대를 거쳐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된 늦깎이 목사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버려진 한 영혼의 구원’이 그만큼 절박하고도 고귀한 사명이었다.
김태숙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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