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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0.09.11 00:00
  • 호수 338

'당진항 지정 운동' 씨앗이 된 사람, 신철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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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항 지정 운동」 씨앗이 된 사람
‘당진은 왜 평택항인가’
이것이 2년간 그의 화두였다

당진출신 해운사업자 신철석씨

9월7일 <당진항 지정 범군민추진위원회 designtimesp=9702>가 결성되었다.
지역사회 발전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 많은 주민들이 군민회관에 모여 독자적인 항만시설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평택항이라는 이름으로 국제사회에 알려진 예속적인 현실을 극복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이 자리에서 많은 좌중의 이목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 있었다.
한보철강 부두에서 해운대리점 (주)아산해운을 운영하는 신철석(38세)씨. 신씨는 이날 무대에 올라 당진항의 현실과 문제점, 나아가 그 해결책에 대해 대중강연을 한 강사였다. 그는 특유의 제스처를 동반한 달변과 열정어린 호소로 좌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신씨가 좌중을 사로잡은 진정한 이유는 그의 말솜씨와 해박하고 시원한 논리가 아니었다. 이날 소개된 바와 같이 그는 잃어버린 항구, 당진의 문제를 처음 제기한 장본인이었으며 지난 2년간 포기하지 않고 이를 밀고나와 급기야 이날 대회가 가능하도록 기꺼이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되어준 사람이었다.
신씨가 부산 현대상선에 근무하다 고향 당진으로 온 것은 지난 96년. 해운대리점 운영이라는 직업상, 항만에 대해, 항만과 도시발전에 대해 직접적으로 경험과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그였지만 다른 사람의 회사에서 일할 때는 그런 고민을 할 여력이 없었다고 털어 놓는다.
“그런데 막상 제 사업체를 가지고 이모저모 생각해 볼 여유가 생기면서 문제가 보이더라구요.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98년 중반 경이었어요. 항구시설물이 분명히 당진에 있고 당진이라는 지역명이 엄연히 있는데 왜 ‘당진항’이 아니라 ‘평택항’일까. 참 의아하더군요.”
이미 세계 23개국을 사업겸 여행겸 해서 다녀본 그였지만 아무리 손바닥만한 작은 지역일지라도 이렇게 다른 지역의 이름을 따다 붙인 항구는 본 일도, 들은 일도 없는 터였다. 그래서 더욱 이상했다.
젊은 시절을 배와 함께, 바다와 함께 세계 여러 나라, 여러 항구를 돌아다니며 그들 나라와 지역마다 참으로 다른 그들만의 문화와 분위기를 접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지만 세월이 가도 여전히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항구의 이름이었다. 도시의 이미지와 함께 뇌리에 남은 이름이야말로 상품의 브랜드와 같은 것. 그것이 경쟁력이고 그것이 살아남는 무기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그로서는 당진의 이 예외적인 상황이 적잖이 놀라웠다. 게다가 그는 당진읍 대덕리 촌놈(?), 절절이 고향 당진이 그리워 무작정 환향한 몸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진군의 최고 수뇌부라고 생각되는 당진군청의 문을 두드렸다. 관련 자료도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 뒤 반년간 꿩 구워먹은 소식 뿐이었다. 반년 뒤 군청에서 이를 위한 기획팀이 꾸려졌다는 소식이 들리고 지역신문 당진시대에 대서특필되고 개발위원회에서 서명운동을 벌인다는 얘기가 들리긴 했지만 지역사회 전체의 반향은 썰렁했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 문제를 설파했고 연구를 했고 자료를 만들었고 제안을 했다. 하지만 사정은 진전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아주 물건너 가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는 고향이 뭐 그리 좋다고 돌아왔던가 공연한 회의까지 밀려왔다.
“물론 저같은 서민은 서민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저 역시 생업에 바빠 한 1년간 문제의식 없이 지냈으니까요. 군민들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각자의 생업이 있잖습니까. 하지만 군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그것을 생업으로 하는 공무원, 특히 지도그룹은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주민들 사이에서 불길이 당겨지고 군의회가 가세해 당진항 지정 움직임이 상승기류를 타기 전까지 속이 탔던 심정을 가라앉히며 신씨는 냉정하게 되짚어본다. 신씨의 평가는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군은 군민들로부터 제기된 이 사안을 울며겨자 먹기로 떠안아 단편적인 대응책을 세울 것이 아니라 당진항을 매개로 어떻게 당진을 발전시킬지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마스터플랜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자체 역량으로 어렵다면 전문적인 민간집단에 외주를 주든지, 아니면 이 분야 전문가를 채용하는 특단의 조치를 하든지, 그 주체가 당진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그러나 이제야 시작입니다. 어쩌다 제가 이 한복판에 서게 되었지만 제가 한 일은 고작해야 씨를 뿌리는 일이었을 겁니다. 이제 가꾸고 거두는 일들은 군민들 가운데 다른 분들이 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군민전체의 몫일지도 모르죠.” 신씨가 말하는 당진항 지정의 핵심은 ‘지방자치단체가 마땅히 자기 항구를 가지고 지역발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명백한 원칙을 해양수산부로부터 확인받고 그것을 설득하는 일’이다. 당진항으로 지정된 뒤에는 항만 활성화라는 더 큰 과제가 있으며 거기에는 반드시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뒷일까지 걱정을 한다.
당진초등학교와 당진중학교를 졸업한 뒤 천안 북일고에서 목포해양대를 거쳐 바닷길로 수많은 대륙의 항구를 경유해서 돌아온 고향. 교도소 생활과도 같았던 대학생활에서 2년간 최다 독서상을 받았을 만큼 방대한 독서량, 향수병에 걸려 날마다 대덕리를 꿈에 보던 사랑을 가지고 다시 온 고향. 고향에 대한 애착이 유난한 것은 늘 돌아와야지 돌아와야지 하다가 정작 돌아오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 잠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신 것에 대한 죄스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고향을 다녀갈 때마다 차안에서 쏟던 눈물을 다시는 흘리지 않아도 된다. 다만 바램이 있다면 고향에 돌아온 신고식처럼 터진 당진항 문제가 좋은 결실을 거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 다른 누구도 아닌 어릴적 동창녀석들로부터 이런 가벼운 위안을 받는 일이다.
“짜아식, 고생했다, 임마. 오늘은 내가 술 한잔 살께.”

김태숙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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