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실시간뉴스
편집 : 2024-04-26 19:24 (금)

본문영역

[출향인 인터뷰 (10) - 정 용 선 경찰청 정보심의관] “나는 자랑스런 당진사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찰대학 수석 졸업 후 최연소 경무관 승진까지
“농민단체에 감사패 받았던 경찰서장, 자랑스러워”

 

경찰대학 제3기 수석졸업생. 경찰청 사상 최연소 경무관 승진 기록.
정용선 경찰청 정보심의관은 지난해 경무관 승진 후 경찰청 기획조정심의관을 거쳐 정보국에서 전국 각지에서 수집되는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직책인 ‘정보심의관’으로 일하고 있다.
시군 경찰서장이 경무관보다 한 계급 아래인 총경이니 군대 계급에 비유하자면 장성급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주민존중 없던 공무원 보고 경찰되기로
“경찰청에 아침 6시40분에 도착합니다. 그리곤 밤 11시에 집으로 향해요. 주말도 없이 일한 게 어느새 8년쯤 된 것 같네요. 인터뷰를 온다니까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아내와 두 남매에게 ‘나쁜 가장’이었는데 늘 이해해줘 고맙다고요.”
1964년 순성면 양유리에서 태어난 그는 면천초등학교와 면천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으로 이른바 ‘유학’을 떠났다. 인재가 많기로 소문났던 면천중학교에서도 그는 두각을 나타냈다. 대전 대신고를 졸업하고는 경찰대학으로 진로를 잡았다. 1980년대에는 대학이 많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경찰대학은 최고의 경쟁률을 자랑했었다. 국가에서 학비를 모두 부담하는 장점은 우수인재들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학교와 기숙사, 도서관을 오간끝에 그는 수석졸업의 영광을 안았다.
“경찰이 되고 싶었던 이유요?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때였는데 농사를 짓는 부모님을 자주 도와드렸어요. 산에서 나무를 함부로 베면 안되는 시기였는데 저희집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어서 산에서 나뭇가지 몇 개를 베어왔었어요. 법을 어긴 겁니다. 그런데 면사무소 공무원이 집으로 찾아와서는 제 부모님 이름을 마구 부르는 겁니다. 아무리 법을 어겼다해도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걸 보고 어린 나이에도 ‘저래선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경찰이 된 후 그에게는 개인생활이 없어졌다. 경찰 임용이 1987년이었다. 경찰대학 출신은 경위 계급장부터 시작한다. 임용 3년만에 경감 승진, 시군 경찰서장인 총경은 2003년 40세가 되기 전에 승진임명장을 받았다. 그리고 역대 최연소 당진경찰서장으로 부임했다.

“농민단체 감사패 받은 서장”
당진경찰서장 생활은 1년여 남짓이었다. 그 1년여를 그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2003년 4월 취임 직후부터 일이 터졌다. 화물연대 파업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나 물류가 마비된 것이다.
“서해안고속도로 진입로를 화물연대가 점거한 일이 있었어요. 고속도로가 마비됐으니 담당 경찰서장은 옷 벗는 일만 남은 겁니다. 무력 대신 대화를 먼저 시도했습니다. ‘당진 출신 후배 서장 옷 벗기니까 좋냐’고. 그러고 얼마 안 있으니 점거를 풀었어요.”
2003년은 농업시장 개방으로 인해 농민단체들의 집회와 반대가 격렬했던 시기였다. 당시 당진군농민회장은 이종현(현 도의원)씨, 농업경영인회장은 정상영씨였다.
이 두 단체는 서울에서 집회가 있을 때마다 버스 수십여대를 동원해 수천여명의 농민들을 서울로 올려보냈다. 당연히 담당 경찰서는 비상이 걸릴 수밖에. 정용선 경무관은 “당진의 버스가 전국에서 제일 많은 110대였다”며 “집회 때마다 초비상이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두 분(이종현, 정상영)은 저를 기억하실 겁니다. 안전사고 예방을 최우선으로 했어요. 다 고향 어르신들, 선배들인데 다치시면 어떻게 합니까. 서울 여의도광장에서도 버스가 너무 많이 몰리니 못들어가게 하자 제가 나서서 들여보내주라고, 그리고 나올 때도 길 안 잃어버리게 잘 모시고 나오라고 서울에 연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농민단체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이 생기면 무력 진압에 앞서 항상 대화를 먼저 하려고 했다. 화물연대 파업은 물론 기업과 노조 갈등에서도 직접 해결이 아니라면 중재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당진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 당진농민단체들이 그에게 감사패를 건네줬다. 그는 “고향후배에게 주는 감사패가 아닌 농민들의 마음이 담긴 감사패라서 더욱 기쁘고 의미있었다”며 “당진경찰서장 1년여는 내 경찰 생활에서 잊지 못할 기억뿐”이라고 말했다.

서대문경찰서는 아직도 당진쌀 먹는다
정보심의관이라는 자리는 경찰청 내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리다. 경찰청 내 경무관급의 국장이 있지만 심의관이 있는 국은 정보국 뿐이다. 전국에서 보고되는 수많은 정보들을 취합하고 분석해 매일 아침마다 경찰청장에게 직접 브리핑하는 일이 그의 업무다.
당진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어떠한 것이 사회이슈인지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소속 팀장들이 “당진 소식은 제일 먼저 챙기시더라”고 말할 정도다. 고향에 대한 관심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서대문경찰서장 시절 구내식당에서 합덕 정상영씨를 통해 구입한 당진쌀을 사용해 서대문서에는 지금도 당진쌀을 사용한다고. 경찰청에도 당진쌀을 홍보하기 위해 노력중이지만 아직까지 성과가 없어 아쉽단다.

‘양심’과 ‘실천’, ‘존중’과 ‘배려’
그가 늘 삼아온 좌우명이란다. 경찰생활 20년이 넘은 그는 “경찰들만큼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도 없다”고 말한다. 경찰이라는 직업 특성상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라고.
이 좌우명은 붓글씨로 쓰여져 표구된 채 그의 사무실 한 켠에 걸려있다. 그는 경찰생활이 여느 조직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존중이라는 말은 윗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아랫사람을 존중할 때 제가 존중받을 수 있는 거지요. 배려 역시 마찬가지지요. 나보다 윗사람이 편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제가 배려해드리는 겁니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당진사람’이라고 여기는 그는 아직도 당진의 지인들과 경찰서장을 지내며 맺은 인연들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고 있다. 때로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때로는 통화도, 때로는 선물도 보내면서 지낸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정치권에 꿈이 있지 않느냐’는 오해를 하기도 한다고. 정용선 경무관은 딱 잘라 거절한다. “경찰이 내 천직이고 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이력
 -1964년 순성 양유리 출생.
 -면천초-면천중-대전 대신고
 -경찰대학 3기 졸업(수석)
 -당진경찰서장(2003~2004)
 -서울 서대문경찰서장(2005)
 -청와대 민정수석비서실 행정관
 -현 경찰청 정보심의관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