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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1998.11.30 00:00
  • 호수 250

특별인터뷰/김부영 당진고교장-교육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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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영 당진고등학교 교장선생님

교육의 진정한 목표는 ‘학생들 자신의 성장’

내가 한 알의 밀알되어 아이들이 성숙해지고 환경이 바뀐다면...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는 김부영 교장선생님을 찾아간 것은 늦가을 오후였다.

하루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하나 둘 하교하는 교정에는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당진고등학교. 작년까지만 해도 당진여자고등학교이던 이곳은 올해 남녀공학으로 바뀌고 첫 남학생을 입학시켰다.

1층 복도를 따라 교무실 옆에 나란히 위치한 교장실은 아담하고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으며 꾸미고 갖춘 흔적이라곤 없었다. 올 여름 배정된 학교예산 중에 냉방기를 구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는데도 교무실 두방과 서무실에다 갖춰놓고 교장실은 다음으로 미뤘다.

‘훌륭한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인터뷰를 하겠느냐’며 여전히 고사하던 김교장 선생님은 ‘이왕 왔으니 차나 한잔 대접하겠노라’고 기자를 마주 앉으셨다.



향토사 교육으로 시작

올해로 교육경력 41년째를 맞는다는 김교장 선생님은 대부분의 세월을 석문중학교에서 보내신 터였다. 대호지에서 나고 자라 서울서 대학을 나온 뒤 고향에 있던 그를 교육현장으로 불러낸 것은 석문중학교를 설립한 이사장 신이균씨였다. 김부영 교장선생님은 당시 그 분의 투철한 교육관과 향토애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해가 1958년. 이지방을 살만한 곳이 되게 하려면 우선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어른이 된 주민들에게 지역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가르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학교 이사장과 뜻이 통해 때로는 학생들과 때로는 주민들과 함께 지역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일은 끝없이 이어졌다. 집집마다 마을어귀마다 버려지다시피한 옛 물건들을 주워모으고 틈나는대로 석문면 관내를 돌아 더이상 밟지 않은 땅이 없을 정도였다. 석문중학교에는 지금까지 학생들과 함께 주워모은 골동품들이 작은 박물관 하나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모아졌다.

또 석문면 전역에 걸쳐 자생하는 야생꽃 <고란초>를 찾아냈는가 하면 현재 이 학교 교장으로 있는 신양웅 선생님 등과 함께 <소난지 의병총>을 찾아내 고증작업과 해마다 조그만 기념식을 갖기도 하였다.

석문중학교에서 보낸 김부영 교장선생님의 34년은 마을의 모든 주민과 어린이와 지역의 역사와 숨결과 함께한 길고도 한결같은 시간이었다.

“벽지에서 오랫동안 고생한다고 주위에서는 걱정반 격려반을 보내곤 했지만 저에게는 정말 소중하고 즐거운 세월이었습니다.”

서른둘의 젊디젊은 나이에 석문중학교장을 맡아 오랜 세월을 보낸 그는 1990년이 지난 어느해 문득 자신이 이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옳은지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사립학교지만 후배교사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는 게 마땅한 도리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때마침 서울대 부설 교육행정연수원에서 6개월 코스 연수가 있었고 이어서 사립에서 공립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50이 훨씬 넘은 나이에 시험을 쳐서 도교육청 장학사로 발령받은 그는 3년전 다시 관내 송산중학교 교장으로 내려왔다.

송산중학교에서 김부영 교장선생님의 ‘지역적 교육풍토 확립’이라는 방침은 이 지역에 또다시 변화의 새바람을 몰고 왔다. 부모들이 바쁘기 한량없고 한보철강의 가동으로 문화적으로도 위험하고 혼란스러운 송산지역은 ‘학생들에게 있을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안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학교와 가정, 지역이 서로 고립된 채 학생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덮어두고만 있었다.

김교장 선생님은 이 3자 시이에 놓인 벽을 허물고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문제를 진지하게 공개하고 학교와 가정, 지역의 공동노력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이 지역의 주인, 교육의 진짜 주인은 지역주민’이라고 생각했다. 교사들이야 머물다 떠날 수도 있지만 주민들은 항상 그곳에 살면서 이미 교육환경을 조성하고 있기도 하고 또한 교육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 운영위원회를 통해, 정규 근무시간이 끝난 늦은 저녁에 관심있는 교사와 13개 부락을 돌며 마을회 정착시키기를 2년, 이제 학교와 각 가정과 지역은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로 지역의 모든 학생들을 보호하는 연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제 교육관은 특별한 게 아닙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 그것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건 학생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니까요. 자기 희생없이 맺을 수 있는 결실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김부영 교장선생님은 요한복음서를 인용하여 교육관을 상징적으로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제 노력 뿐이었겠습니까? 훌륭한 학부모 대표들이 계셨고 멀리 출장을 나갔다가도 야간 마을회에 빠짐없이 함께 해주었던 한 일선교사의 헌신적인 노력도 있었습니다.”

올봄 당진고등학교로 다시 자리를 옮기게 된 김선생님은 여전히 <사랑의 실천>이라는 교육관으로 학생들을 대한다. 바쁜 선생님들을 도와 전교학생들을 하나씩 면담하고 있기도 하고 선생님선에서 해결나지 않은 말썽꾼들도 종종 교장선생님과 진지한 상담을 거치게 된다.

김교장선생님은 수년전 돈 6천원을 훔쳤다고 가족들로부터 모진 소리를 듣고 갈 곳 없어 방황하다가 자기집 뒷마당에서 자살했던 한 학생의 여리고도 절박했을 심정을 떠올렸다. 그 아이가 죽음을 택하기 전에 찾아갈 수 있는 곳, 그곳이 학교요, 교사가 되기만 했다면...

“요즘 아이들은 어쩌면 고아 아닌 고아들입니다. 부모가 모두 바빠 세심한 배려를 해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지역사회도 내 자녀가 아니면 아예 관심을 가져주질 않습니다. 사회적인 보호망이 이렇게 너무나 느슨해진 반면 아이들 자신의 자기통제력은 과보호 탓에 형편없이 약해져 있지요. 사회적인 관심도 높아져야겠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중심을 잡도록 정신적인 능력을 길러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것이 학생을 내 자녀같이, 교사를 내 형제같이, 학교를 내 집같이 사랑하고 실천하는 김부영 교장선생님의 현실진단이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동네어른과 아이들을 모아놓고 야학을 통해 한글을 가르쳤던 김부영 선생님은 교직에 타고난 소명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내세우길 싫어하는 겸손한 성품인데도 벌써 오래전에 교육계 최고의 상 <한국교육 대상>을 받기도 했던 김부영 교장선생님. 그는 누가봐도 ‘보여주는 데 치우친 보통의 교육행정’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학생들 자신의 성장’을 위해 때로는 부끄러움을 과감히 드러내는 진지한 교육활동이었다.

우리 내면의 성장을 격려해주는 참스승의 기억이 누추하기만 한 이 시대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오래도록 기억된다는 것은 스승으로서 얼마나 기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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