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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구의 사람아 사람아-사이토 요사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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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용 가 일본인으로 귀화한 한 당진인의 2세 사이토 요사가스

징용 가 일본인으로
귀화한 한 당진인의 2세 사이토 요사가스
아버지는 징용후 탄광 탈출해 일본인으로 변신 사촌 17형제 어머니께 절할 때 눈물만

지금 젊은 사람중에는 “묵은 세배”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섣달 그믐날 친척 어른이나 오래도록 집안끼리 가까이 지내고 있는 어른들을 찾아가 묵은 세배를 드리게 된다.
묵은 세배의 본뜻은 오는 정초의 설빔에 혹시 생계가 궁색하여 곤경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여 두루 그 집안의 가세를 눈여겨 살핀 뒤에 살기가 어려운 빛이 보이면 슬며시 얼마간 갖고간 세의금(歲儀金)을 방석밑에 찔러넣고 물러나오는 것이다. 묵은 세배의 풍속이야말로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이며 다시 살아났으면 좋은 풍속인 것이다. 필자도 묵은 세배를 다니던 기억이 있지만 어려서 그랬던지 세의금을 놓고 온 적은 없고 오히려 후한 대접을 받고 왔던 것이다.
설을 지내면 나이를 한살 더 보태게 되니 내나이 이순(耳順)의 절반이 지났다. 이 나이에 이 시간에도 아직도 무엇에 쫓기듯 허둥거리며 있는 나와 또 내주위의 몇몇 가까운 친지들을 보게 된다. 아직도 뭘 하겠다고 엄동설한에 동분서주 하면서 힘에 부쳐 허덕거리는 사람, 치부를 더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친구, 그리고 어언 20여년을 글을 쓴다고 원고지를 수만장 메웠지만 남길 것은 한장도 없는 허탈함에 당황하며 조바심치고 전전긍긍하고 있으나 모두가 얼마남지 않은 이세상 시간에 안절부절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마음을 가꾸는 일은 바로 스스로를 바치는 일이다”라고 말한 생덱쥐베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같은 이순을 넘긴 사람들은 재물과 명성을 모으는 일이 이나라 남에게 주는 일, 갖는 것이 아니라 벌이는 일 등이 고고하며 명예스럽고 돋보이는 마감의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인생은 언젠가는 나자신마저 존재의 마지막 길목에서 대자연으로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이 아니겠는가.
사이토 요사가스씨.
1월 17일! 일본에서는 악몽의 날, 공포의 날로 역사에 기록될 고베시에 대지진이 발생한 날이다. 5천여명의 생명을 빼앗겼고, 이재민수도 30만명, 재산피해는 어머어마한 숫자, 고베시가 쑥밭이 된 날.
고베시는 마치 지옥의 문 하나가 열려 불길이 솟아나와 인간의 정신을 말려 죽이려 너풀대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하루빨리 복구가 마무리 되어 정상적으로 생업을 할 수 있도록 당진시대 독자 여러분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드린다.
같은 날 오후 2시, 부산 국제부두. 부산에서 일본 하까다로 가는 훼리호에는 사이토씨와 부인, 딸, 아들형제, 그리고 어머니와 외삼촌, 이모등 8명이 배난간에 나와 부두에서 배웅나온 한국사람인 사종(四從)들과의 이별이 아쉬워 이쪽과 저쪽에서는 눈물을 닦기에 앞을 보지 못하고 손만 흔들고 있었다. 사이토씨의 아버지는 분명히 한국사람이었다. 일본인으로 귀화(歸化)하였다고 정신과 피와 살과 뼈까지 귀화된 것은 아니었다.
사이토씨의 아버지는 당진군 면천 산골마을에서 몰락한 명문 사대부 집의 후손, 4형제의 막내로 1925년에 태어났다. 17세때 징용으로 일본 북해도 탄광으로 끌려가 노동을 했다. 어린나이였지만 부모를 뫼시고 대가족의 가솔을 이끄는 큰형님의 징용을 대신하여 자청으로 징용을 가게된 것이다.
탄광의 생지옥 같은 노동생활 1년쯤 되었을 때 탈출을 하여 고국으로 나오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다 전쟁이 한참 때라 규슈지방의 “타니세이부시”의 농촌으로 숨어들었다. 물론 일본인 전쟁고아로 변신하여 일해주고 밥을 얻어 먹고 지냈다.
일본이 전쟁에 항복한 후에도 거기서 눌러살면서 사이토 가(家)의 양자로 입적하고 또 후에 사위로 들어 앉았다. 아들로 사위로 몫을 다하기 위해 또 인정이 풍부했던 사람이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쉴새없이 일하는 개미같이 밤낮 가리지 않고 농사를 지어 한집의 가장으로서 집안의 터전을 굳혀갔다. 그리고 딸, 아들 남매를 두었는데 바로 아들이 사이토 요시가스씨이다.
사이토씨의 아버지는 일본인으로 70세까지 살으시다가 작년 11월에 타계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조국의 조카들의 말씀을 많이 하셨기에 사이토씨는 아버지의 부음(訃音)을 한국으로 전했다. 그리하여 한국인 사촌 몇분이 일본으로 가 그분(작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일본인 숙모님과 사촌(사이토)과의 첫 대면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번 1월 13일에 한국인 사촌들이 사이토씨등 그 가족을 초청하였기에 4박5일동안 인정많고 훈훈한 기가 흐르는 아버지의 고향땅을 사이토씨는 난생 처음으로 밟으면서 한국의 혼을 마음껏 마음속 깊이 마셨던 것이다.
한국의 사촌 17형제가 숙모님(사이토씨 어머니)께 큰절로 인사를 올릴 때 언어소통이 안되어서인지 옆에 앉아 있는 사이토씨는 눈물로 답을 하면서 “고맙습니다”라는 말뿐이다. 우리 인간들의 감정은 판단보다 빠른 것이 눈물인 것이다.
사이토씨는 통역을 맡은 필자에게 일본으로 가서 한국어 강습소에 다니면서 아버지의 나라 말을 배워가지고 내년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격언이 이 자리에서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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