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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구의 사람아 사람아-합덕읍 운산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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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덕장의 암흑기 일제의 간혹한 수탈과 전쟁동원으로 30년대 중반까지 성시를 이루었던 합덕장은 점점 쇠퇴해갔다

합덕장의 암흑기 일제의 간혹한 수탈과 전쟁동원으로 30년대 중반까지 성시를 이루었던
합덕장은 점점 쇠퇴해갔다
합덕읍 운산리<4>

합덕의 5일장은 1930년대 중반까지는 날로 성시(盛市)를 이루어갔다. 큰 장으로서의 구색은 갖추지 못하였지만 많은 장꾼들이 오고 갔으며 면단위의 장으로 또는 지리적으로 오지에 놓여있는 합덕 5일장은 그런대로 장으로써 갖출것은 갖추어 가면서 날로 발전상을 보였다.
그러나 30년대 후반부터는 장의 모양새는 점점 쇠퇴해갔다. 일본인들이 전쟁준비에 혈안이 되어 모든 생필품의 생산을 중단해 가면서 군수품의 생산으로 전시체제로 들어선 관계로 장꾼들은 팔 물건도 살 수 있는 물건도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장이 서지도 못하였다.
이때는 장날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체가 암흑기에서 생과 사의 고개를 넘나들었던 것이다.
이럴즈음 일본인들은 초등학교에서 모국어(조선어)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어를 강제로 사용하게 하였다. 면 주재소의 일인순사(순경)들은 긴 칼을 옆구리에 차고 다니면서 장꾼들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 제압하는데 혈안이 되었으니 그들의 시퍼런 서슬에 억눌려 꼭 필요치 않는 장나들이는 자제를 하게됨으로 장마당은 더욱 썰렁하게 되었다.
1939년에 세계 2차대전을 독일에서 일으키자 일본은 독일, 이태리아 3국 동맹을 맺고 전쟁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일본인들은 한국사람들도 일본의 군으로 입대할 수 있는 법령을 제정함과 동시에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거짓 허울로 한국의 말살정책을 펴나갔다.
한국인 18세이상의 청장년들에게 징용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마구 잡아들여 일본인들의 전쟁터에서 노동을 강요했으며 일본인들의 탄광이나 비행장 및 군용시설을 조성하는데 노동력을 이용했다. 또한 중학교 이상의 학력을 갖춘 젊은이들은 징병으로, 군인으로 소집하여 전쟁터로 내몰고 일본의 총알받이로 우리들의 청년들이 희생을 당했다.
일본은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악랄한 모든 방법을 동원, 우리들의 물자를 수탈했다. 쌀, 보리등은 공출(供出)이라 하여 강제로 빼앗아 군량미로 사용했으니 우리들은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생명을 부지하였다.
그뿐이 아니라 각 가정에서 사용하는 놋수저와 놋그릇등 무쇠로 만든 가마솥, 교회의 종등 모든 쇠붙이를 강제로 거두어 무기생산에 사용했고 심지어 경북 안동지방에서는 철도의 레일까지 뜯어가 일본인들은 끝간데까지 가고 있었다.
1940년대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일본인화 정책으로 창씨제도를 실시, 우리들의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개명을 시켰으니 90%이상의 한국인들이 일본인과 같은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젊은 처녀들은 정신대로 불러들여 가혹한 만행을 당하게 하였으니 이에 대한 수습책은 오늘까지도 마무리를 짓지 못한 상태다.
이와 같이 장에는 살 물건, 팔 물건도 없거니와 장에 출입한 많은 청장년들이 징용, 징병으로 끌려가는 관계로 장에 출입할 사람도 없게 되었다. 그야말로 전 국토가 암흑의 늪에 빠져있었거니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 일본인들의 학정을 피해 해외로 도피, 망명하는 수가 늘어나게 되어 나라안이 전체로 텅 비어있는 실정이었다.
일본인들은 식량증산이란 미명하에 초등학생까지 이용하였다. 각 초등학교의 운동장과 작은 빈터만 있으면 콩, 감자, 피마자, 해바라기 등을 심게 하여 어린이들의 노동력도 강탈당하게 됐다. 퇴비증산이라 하여 등교때 풀을 베어오게 하고 학과시간에도 뜰로 나가 풀을 베는 작업을 시켰다.
합덕 중심에 있는 몇몇 가게에는 이른 새벽부터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있는 진풍경을 보게 된다. 다름아닌 담배 한갑을 사기위해 담배의 빈갑을 손에 들고 담배팔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물론 열지어 서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 파는 것이 아니고 몇십명에게 팔고 끝나는 것이다.
농민들은 문전옥답에서 생산하는 쌀은 모두 공출을 당했으며 봄에는 논에 보리를 파종하여 그것도 공출로 빼앗겼으니 먹을 것이란 콩, 감자, 옥수수가 일등품 식량이고 대개는 뜰에서 산에서 나물을 캐어 생명을 유지하는 실정이었다. 가을추수가 끝나면 일본인 관리들의 눈을 피해 쌀 몇말을 숨겼다가 죽을 쑤어 겨우 살았으며 전쟁말기에는 일본인들이 식량배급으로 주는 콩깨묵으로 먹거리를 해결한 때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50세 중반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실제로 겪은 상황이다.
지금 나라의 경제가 몰락 직전까지 와 있다. IMF의 도움을 얻어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는 실정이나 우리들은 과거에도 어려움을 잘 이겨냈던 저력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지혜롭고 슬기롭게 중지를 모아 경제위기를 타개해 간다면 머지않아 또 살기좋은 시대를 맞이하리라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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