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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1.03.12 00:00
  • 호수 361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 오로지 생명을 구할 뿐” - 이영준 소장과 소방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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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서산소방서 당진파출소 이영준 소장과 소방가족들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 오로지 생명을 구할 뿐”
“사람이 있는 줄 알았다면 우리라도 그랬을 겁니다”

지난 4일 소방관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울의 홍제동 화재는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그 시각에도 전국의 수많은 소방가족들은 여전히 위험한 화재현장에 출동하고 있었으며 잠깐 짬을 내어 뉴스를 보다가 동료소방관들의 죽음에 남몰래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서로 얼굴 한번 대면한 적이 없는 처지였지만 위험 속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그들의 동료애는 그만큼 더 깊을 수밖에 없다.
막 감돌기 시작하는 봄기운과 함께 날아든 뜻밖의 부음에 주체할 수 없는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차하는 3월, 점심식사를 마친 당진소방파출소 가족들은 밀린 업무와 사무정리를 하느라고 모처럼 파출소 사무실에 모여 있었다. 마침 화재나 큰 사고가 없는 덕이었다. 그러나 이런 날이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고 이런 날이라고 해서 긴장을 늦출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닥칠 위기 앞에 놓인 잠시간의 평화다.
이 소방파출소의 이영준(42세) 소장은 며칠 전의 홍제동 화재에 대해 이렇게 입을 열었다.
“아마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건, 그것이 누구건, 최후의 한사람까지 생명을 구하는 것이 저희들의 임무니까요”
불이 난 집에서 가족중 한 사람이 미처 나오지 못했다는 주민들의 말에 따라 화재현장에 다시 들어갔다가 무너지는 집과 함께 생을 마감해버린 6명의 소방관을 떠올리며 이소장도 그동안 적지않은 상념에 잠겼던 모양이다.
현재 당진군의 소방업무는 서산소방서의 관할 아래 당진파출소와 합덕파출소에서 나누어 보고 있다. 그중 당진파출소가 관할하는 구역은 고대, 정미, 대호지, 석문, 송산으로 이들 소지역에 각각 1개씩 5개의 대기소가 있다.
당진파출소 관할아래 6개읍면의 소방과 긴급구조, 구급활동에 종사하는 인원은 이 소장을 포함해 모두 30명. 그리 넉넉지 않은 인원이지만 그나마 이 소장과 민원담당 강일묵 반장을 제외하고 24시간 교대근무이기 때문에 실제상황에 투입되는 인원은 그중 절반이다. 당진파출소에는 매일 7명이, 각 대기소에는 매일 한명이 만일을 위해 근무를 보고 있다. 석문대기소는 구역이 넓고 해안가 사고가 빈발해 두명이 근무한다.
이 인원이 뛰는 활동범위는 비단 화재진압만이 아니다. “불이 나면” “119”라고 배운 것은 이미 고전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요새<119>로 더 많이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잡은 것은 오히려 구조·구난·구급활동이다. 해안에 위치한 당진의 경우 해안에서 일어나는 익사사고등의 가지가지 수난도 소방파출소의 일이고 긴급환자 수송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모든 종류의 사고가 일어났을 때 인명을 구조하는 일이 우리의 일이죠. 교통사고 뿐만 아니라 기계사고, 엘리베이터 사고. 심지어 잠긴 현관문이나 자동차문을 여는 것도 우리들의 몫인 걸요.”
민원담당 소방사 강일묵씨의 말이다.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때 현장을 보존하고 사건의 전모를 조사해 정확한 판단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 경찰의 일이라면 그 복잡한 가운데에서 아무런 판단도, 시비도 가리지 않고 묵묵히 재빨리 사람과 생명을 구출하는 것은 소방관들의 일이다. 가해자건 피해자건 상관없다. 오로지 생명을 건질 뿐인 것이다.
지난해 당진파출소에서만도 구급활동을 벌인 횟수는 1,520건에 이른다. 교통사고와 약물중독, 화상, 급만성질환으로 위급한 사람들을 도와준 것을 말한다. 소방관이 아니면 도울 수 없는 구조상황도 57건. 교통사고로 차속에 끼어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빼주는 경우나 엘리베이터 사고, 문개방의 경우다. 소방장비가 날로 첨단화되고 늘 장비교육울 받기 때문에 소방관들이 투입되는 분야는 날로 늘어가는 것이다. 하루에 긴급상황이 적어도 4건이상은 벌어지는 셈이다.
이런 일상적인 상황에서 불이라도 난다면 파출소는 그야말로 총비상이다. 파출소 상주 인원 7명 중 3명은 소방차 운전대를 잡아야 하고 한명은 계속해서 전화를 받아야 하고 또 한명은 다른 사고에 대비해 출동준비를 해야한다. 그럴 때 이 소장은 현장지휘 뿐 아니라 실제 화재진압에 나서는 장본인이다.
심지어 소방관들은 수해나 가뭄때에도 한몫을 한다. 지난 97년 수해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때도 이 소장은 당진과 인연이 있어서인지 소장직을 맡고 있었다.
이 소장이 기억하는 사건은 많지 않다고 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없어서가 아니다. 빨리 잊을수록 좋고 또 그래야만 늘 다시 출발점에 서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희들이라고 왜 인간적인 두려움이 없겠어요? 겪을수록 눈에 보이는 위험이 많아지죠. 하지만 우리는 바로 상황에 몰입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니까요.”
그래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어느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어이없는 화재현장, 외롭게 혼자 살다 밤사이에 재가 된 집과 함께 사라져버린 독거노인들이다.
몇년전에는 어느 대형공사장 고층현장에서 시멘트반죽이 쏟아져내려 인부몇사람이 시멘트와 함께 굳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중간부분이 허물어진 상층 철근콘크리트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흔들거리고 아래에서는 인부를 덮친 시멘트가 굳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소장은 자신이 먼저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나설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나섰다. 이 소장은 다른 소방관들과 밤이 어두워지도록 굳어가는 시멘트 속에서 시신들을 수습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의 일이 아마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최후의 활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요. 그것이 심지어 주검을 찾는 일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이 소장은 자신의 직업이 만족스럽다고 한다. 10년전만 해도 소방관에 대한 인지도가 낮았지만 오로지 생명을 구하고 사람을 돕는다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어느 누구보다도 각별한 이웃으로 여겨준다는 점이 고맙고 뿌듯하다. 하지만 그런 주위의 시선보다도 더 중요한 건 스스로 갖는 자부심이다. 비록 보수가 적고 위험한 일이지만 그것이 바로 남을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소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떠오른 것은 오래된 소방영화 <타워링 designtimesp=1710>과 소방지휘관으로 등장한 주연배우 스티브 맥퀸이다. 스티브 맥퀸을 조금 닮았다고 하자 이 소장은 “타워링은 정말 훌륭한 영화일 뿐만 아니라 소방교육교재로 활용될 만큼 대단히 과학적이고 치밀하게 구성된 영화“라고 말하며 웃었다.
김태숙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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