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하고 반듯하신데다 부지런하셨던 아버님의 영향으로 나 역시 부지런함만큼은 누구 못지 않았었다. 덕분에 지금 돌이켜봐도 내 삶이 편한 삶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옛 사진들을 들춰보는데 기분이 묘하다. 첫 번째 사진은 결혼할 때 찍은 사진으로 기억하는데 무척 잘 나왔다며 남편(손재동, 64)이 지갑에 넣고 다녔던 사진이다(웃음). 남편과는 34년 전에 합덕 원
당진에 온 지 어느새 18년이나 흘렀다. 포항이 고향인 내가 남편(김각호, 49)을 따라 당진에 오게 된 후 내 사업과 지역을 위한 봉사활동에 매진해왔다. 그러더니 어느새 머리는 희끗희끗해졌고 나이는 들었다.첫 번째 사진은 남편과 연애를 시작한 지 한달만에 찾아간 호미곶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남편은 나보다 한 살이 적었는데 날 만날 때는 나와 동갑이라고
[바로잡습니다] 본지 825호(2010년 8월30일자) 4면에 게재된 ‘추억속으로 사진속으로’ 내용 중 ‘장기천 기지시줄다리기보존회 부회장’을 ‘기지시줄다리기 기능보유자’로 바로잡습니다.
2001년 아내(김봉운/당진군자원봉사센터 근무)를 따라 당진에 정착한 지 어느새 10년이 되었다. 85학번인 나는 대학 때 만난 아내와 당진으로 오게 됐다. 첫 번째 사진은 초등학교 때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보니 졸업식 때가 아닐까 한다. 대전에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모두 다녔던 나는 사실 당진과는 인연이 거의 없었다. 꽃으로 온통 뒤덮인 내 모습이
어느덧 내 나이가 쉰살이다. 사진 속에 담긴 내 젊었을 시절 모습이 20대 초반이었으니 저 당시부터 30여년이 흘렀다. 그래도 아직 난 젊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사진은 내가 20대 초반에 찍은 사진이니 무척 오래된 사진이다. 1980년대 초반에 4-H회 활동을 할 때였다. 학암포에서 수련대회를 했을 때 송산면 4-H회원들과 찍은 것
의용소방대 활동을 시작한 지 어느새 30여년이 다 되어간다. 지난 2007년 1월 송악의용소방대장으로 취임하고 연임해 대장을 4년째 맡고 있다. 옛 사진을 담고 있는 앨범이 많지 않은데 찾아온 기자는 나도 모르는 사진을 어디선가 찾아낸다. 이 코너에 실렸던 다른 사람들이 늘 했던 말이 ‘내게 저런 사진이 있었던가’였는데 나 역시 당시
사진을 찾아보니 내가 가진 옛 앨범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앨범마다 먼지가 잔뜩 묻어있었다. 옛 추억 한번 더듬어볼 여유도 없이 내가 살아온 것인가. 앨범들을 돌이켜보며 ‘저 당시엔 저랬었는데...’를 되뇌었다.첫 번째 사진은 군생활을 하던 시절이니 1970년쯤 사진일 것이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내 군생활이었는데 사진이 찍힐 당시에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로 시작한 체육인의 삶이었다. 지난 3월 후임 안진모 회장에게 당진군생활체육협의회장직을 넘겨주고 그동안의 삶을 잠시 돌아보고 있다. 생활체육협의회장을 8년간 맡으면서 종목별 연합회를 30여개까지 늘렸고 체육동호인수도 몇만명에 이를 정도로 외형적인 성장을 이뤘다. 2006년 당진에서 처음 충남생활체육축전을 개최했을 당시 보람과 뿌듯함을 많이 느꼈었다.체육인으로 살아온 순간을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지만 무거운 책임을 내려놓은 지금 그동안 미뤄놓았던 사업과 도움받았던 지인들,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나느라 나름대
새마을에 몸 담은지 20년이 넘었다. 대호지면 장정리 부녀회장으로 시작해 지난해부터는 당진군지회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됐다. 새마을에 대한 추억들을 돌이켜보니 영광스러웠던 순간이 생각나 그때의 뿌듯한 기분이 되살아났다.첫 번째 사진은 지금부터 30년 전 친정 어머니 회갑연때 찍은 사진이다. 30년 전이면 결혼 직후인데 이 때를 전후해 태어난 아들들이
추억의 사진이라! 기자의 한마디에 어머니 댁에서 찾은 두서없는 사진들이다.첫 번째 사진은 ‘두발자유화’는 되었고 교복은 아직 입고 있었던 더벅머리 81년 서야중학교 2학년 때다. 마지막으로 교복을 입었던 세대다. 지금도 생각나는 그때는 ‘꿈이 다듬어지지 않은 순수’(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에서 그 통속과 반대쯤 되는)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풋풋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나)두 번째 사진은 호서대학교 총학생회에 새내기로 활동하던 시절 세미나를 가서 찍은 사진 같다. 지금 보니 “통일의
지난 2000년 귀농해 가곡리에 기차 한 량과 함께 ‘차브민’을 시작했다. ‘기차와 허브 그리고 민박’을 줄여 만든 이름 ‘차브민.’ 주변에서 성공적인 귀농을 했다고 평가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아무것도 모른 채 시작해야 했던 처음에는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첫 번째 사진은 지난 1997년 후쿠
이제야 결혼하고 아이를 두었다. 아직 젊은 내가 무슨 추억이 그리 많을까 싶었는데 연락을 준 기자는 사진첩을 뒤져보더니 나도 잊고 있었던 옛 추억을 끄집어내 주었다. 그때는 나도 저랬는데...(웃음)첫 번째 사진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호서고등학교에도 태권도부가 있었던 것을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호서고에서 유도부가 득세(?)하던 시절
남들보다 좀 늦은 나이에(37세) 내 평생의 반려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됐다. 지난 4월 10일 결혼식을 올린 직후 태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나 평생 가져갈 추억을 만들고 돌아왔다. 혹시 아이는 생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웃음)첫 번째 사진은 지난 1998년 아버지(김경석)의 회갑연이 열렸던 사진이다. 내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인지 내 추억보다 아버지의 추
내게 이런 사진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바쁘게 살아온 것 같다. 아내(박윤자 전 봉소2리 부녀회장)와 추억을 한 장씩 돌아보니 감회가 새롭다. 내 자랑이었던 아내, 데려와서는 고생만 시킨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동안 경제적으로 위기를 겪고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날 믿고 지금까지 함께 해준 아내야말로 내 생애 가장 큰 선물이다.첫 번째 사진은 화장품
어쩌다 보니 내 독사진들만 잔뜩 고른 것 같다. 이 사진들은 농촌체험마을을 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찍은 사진들이다. 젊은 시절이라고 해도 20여년 전이니 그리 오래 된 것도 아니다. 농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왔는데 몇 년전까지만 해도 농촌과 농업에 대한 열의가 꽉 차있던 시기가 있었고 나름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UR(우루과이라운드)
첫 번째 사진은 1977년 11월에 남편을 만나 일주일만에 약혼식을 올렸을 때 사진이다. 어른 말씀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법이라는 말에 두 번 만나서 약혼하고 두 달이 지나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당시에는 모두 그랬지만 나 역시도 그리 넉넉하지 못한 집에 시집온데다 둘째임에도 불구하고 장남 역할을 자처하는 남편을 만나 다섯이나 되는 시동생들 뒷바라
송악면 내도리(고대1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바다에서 살아왔다. 내도리에서는 400여년 전부터 한해 동안의 풍어와 무사태평을 빌며 주민들의 질병과 병마를 물리쳐 달라고 기원하는 풍어제를 지내고 있는데 지난 2007년부터 풍어당굿 보존회장을 맡아 일해왔다. 보존회장으로 일하는 동안 풍어당굿이 외형적으로 크게 확대된 것 같아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고 있다.첫 번
지난 6.25전쟁 때 참전용사였던 나는 1980년 당진군에 정착해 여든 살이 넘은 지금까지 신평 운정리에서 살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6.25전쟁 중이었던 1952년 찍은 사진이었다. 갑종장교학교를 졸업하고 군생활을 시작한 나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갑종장교를 졸업하고 제9사단 중대 화기소대장으로 근무했었다.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나다
농장을 오랫동안 하다가 당진군의원이라는 직책을 맡아 지역을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왔다고 자부하지만 또 모르겠다. 아내는 내게 서운한 게 있을지....(웃음). 살아오면서 내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준 아내(최용순, 59)였다.첫 번째 사진은 내 결혼식날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김효식, 홍승수, 나, 김동수, 조성헌이다. 모두 면천 친구들이었는데
이젠 정치가가 아닌 ‘사업가’ 한성희로 불러줘야 한다. 지난 2002년 도의원에 뜻을 두고 출마를 선언했지만 공천을 받지 못하고 출마의사를 접었던 기억이 있지만 그 이후 정치 쪽에는 미련을 버리고 지금은 사업에만 전념하고 있다.이업종교류회장직을 맡아 지난달 대우볼트의 강희준 대표에게 회장직을 넘겼다. 이업종교류회의 취지와 활동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고 생산적인지 사람들에게 더 널리 알리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열심히 해왔다.첫 번째와 두 번째 사진은 1991년 8월 사업차 당시 소련 사할린주의 네벨스크를 방문해 찍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