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대호지면 번영회에서 대호지면 개발위원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남기준 전 회장으로부터 위원장직을 넘겨받고 지금까지 일해오고 있지만 내가 신문에 나올만한 인물인가 생각해봤다. 기자의 연락을 받고 거절을 할까도 생각해봤는데 8년만에 만난 당진시대 기자의 부탁에 마음이 흔들려서 그만...(웃음) 첫 번째 사진은 1973년 군 생활을 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훈련 도중에 찍은 건데 내가 1년만 더 일찍 군에 입대했다면 베트남 파병장병들 속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경기도 포천에서 군생활을 했는데 저 당시 북한의 김신조 무장공비
지난 2005년 대호지 4·4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120여명이 독립운동가 추서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한 결과로 당진군민대상을 받게 됐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이 올바른 자리를 찾도록 도와드린 것밖에 없었는데 과분한 상을 주셨다. 나의 증조부(남성희)와 조부(남상은) 두 분 모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 증조부에는 대통령표창이, 조부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내려졌다.
서슬퍼런 시대였던 1975년 입대해 군 생활을 했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달랐던 내 군생활 덕분에 제대 후 당진읍 재향군인회장을 16년간 맡아오다 올해 마치고 후배에게 넘겨주었다. 사회생활을 오래했지만 그중에서도 원도심상가번영회장을 맡아오며 동문리 주차장 조성과 원도심권 활성화 페스티벌 개최, 전신주 지중화사업 추진 등이 기억에 남는다.첫 번째 사진은 아내
아내와 결혼한 지 19년째인데 우리는 결혼기념일 대신 처음 만난 날을 기념한다. 결혼기념일보다 더 의미 있는 날이기에. 그날이 되면 선물을 사들고 아내에게 안겨준다. 서로를 만난 그날이 1989년 6월 18일이다. 21년을 함께 한 사이, 자녀들도 셋을 두고 어느 가정보다 화목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첫 번째 사진은 집안 사정 때문에 늦게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결혼식 모습이다. 더 꽃같았던 아내의 모습을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무척 부끄러워했었는데 지금은 부끄러운 모습보다 당당한 사회인의 모습을 더 자주 보여준다. 아내는 “당신
이제 우리 나이로 77세가 되었다. 45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초야에서 지내다 3년전부터 당진군게이트볼협회장을 맡게 됐다. 취미삼아 시작한 게이트볼이었는데 제2의 삶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첫 번째 사진은 1997년 4월 기지초등학교 롤러부 학생들과 찍은 사진이다. 당시 도내 대회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실력을 떨치고 있던 기지초등학교였다. 기지초에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제3대 당진군의회 의원을 지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과분한 자리를 맡아왔는데 2002년 선거에서 후보등록 하루 남기고 불출마를 결정한 후 평범한 농민으로 돌아와 지금껏 지내고 있다.첫 번째 사진은 고등학교 때로 기억하는데 정확하지 않다. 내가 스무살 때 열 아홉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는데 그 당시로 기억한다. 마을 대항 면민체육대회에서 매방리 대표로 출전해 계주에서 당당하게 우승을 했다. 가슴에 새겨진 ‘매방’이라는 글귀를 다시 보니 당시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스무살이면 결혼을 무척 일찍 한 편인데
나의 삶은 청소년 시절의 4-H활동과 성인이 되어 4-H지도자, 농촌지도자활동, 마을이장과 농협 대의원·이사·감사를 통한 협동조합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채워졌다. 그 많은 세월들도 지나고 내년부터는 경로우대를 받게 되니 미래의 삶에 대한 생각보다는 지난날의 추억이 새롭게 떠오를 때가 많다.첫 번째 사진은 1964년 합덕지구(합덕, 우강, 순성, 면천) 4개
사진첩에 끼워져있던 사진들이 이젠 떨어지지도 않는다. 너무 오랫동안 사진첩을 열어보지 않았던 탓인 것 같다. 사진첩 열어볼 여유도 없이 살았다. 첫 번째 사진은 1980년 아내(김종수)와 결혼하면서 피로연에서 찍은 사진이다. 순성 양유리 출신인 아내와 중매로 만나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보니 서로 면천초등학교 동창인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와 이제 내년이면 결
방안 한쪽 구석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사진첩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살펴보며 입가엔 어느새 나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게 된다. 내가 기억도 못하고 있는 나의 옛 모습들. 신문에 싣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사진첩을 뒤적이다 보니 어느새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 있는 듯했다.첫 번째 사진과 두 번째 사진. 비슷한 시기에 찍은 것 같은데 첫 번째 사진은 마을 동무들과 부산에 갔을 때 찍은 것이다.오른쪽부터 황규영, 김북규, 나, 이인배(고인이 됨)인데 나와 한 두 살 차이이거나 연배인 친구들이다.삼봉3리가 고향인 나는
소중하다고 여겨진 순간들을 담아놓은 하얀 조약돌 같은 찰나들이 세월의 담금질에 보석이 되어 내게로 왔다. 첫 번째 사진은 1975년 1월 10일 송악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친구(이진열, 심성보, 이흥우, 김영목, 서재원)들과 함께 졸업 기념으로 찍었다. 앞줄 제일 오른쪽이 나고, 옆에 앉은 영목이와 재원이는 벌써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갔다.두 번째 사진은 1982년도에 음섬 포구 모래사장에서 찍은 것이다. 고운 모래가 가득 펼쳐진 포구에서 근육질의 몸과 절제된 포즈는 30년 세월이 훌쩍 지난 이 늦가을 저녁에도 춥
옛 사진들을 뒤지다 보니 추억들이 참 많구나 싶었다. 내 소중한 추억들임에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들도 참 많았다.이래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 소중히 간직하나 싶다. 추억이란 소중하니까.지난 2006년 군의원선거에 도전했으나 아쉽게 공천을 받지 못하고 출마의사를 접어야했다. 이번에 다시 한 번 지역주민들의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 내년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첫 번째 사진은 1981년에 삽교호관광지 박정희기념탑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결혼하기도 전이며 군대를 갓 제대한 후 찍었다. 저 당시 나이가 23살이었다. 젊었을 당
스무 살에 남편(61, 이석)과 결혼해 신평에 정착한후, 자녀들을 잘 키워 독립시킨 지금, 옛 사진들을 들춰보며 추억에 잠겨본다.첫 번째 사진은 남편과 결혼하고 몇 년 후 천안 현충사로 나들이를 가서 찍은 사진이다. 남편과 1972년에 결혼했으니 1975년 정도일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취직했던 나는 당시 남편의 여동생과 한 직장에 다니다 남편을 만났고 결혼 후 신평에 내려오게 됐다. 나와 남편의 표정에서 저 당시의 기분이 느껴지는 것 같다.두 번째 사진은 연도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주변에서 분위기 있게 나온
갑작스런 기자의 연락을 받고 옛날 사진을 뒤져보았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는 앨범들. 생각해보니 그동안 이 앨범 한번 들춰볼 틈도 없이 살아온 것 같다. 사진들을 보며 한편으론 자랑스러운 생각이, 한편으론 아쉬운 생각도 든다. 언제 세월이 이렇게 지났는지...첫 번째 사진은 1977년 4-H활동을 할 때 찍은 사진이다. 나는 4-H 활동을 하면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어버이날을 맞아 카네이션 달아드리기를 하고 찍은 기념사진이다. 이후 의용소방대, 자율방범기동순찰대, 새마을지도자 등의 활동을 계속 해왔다. 지금은 이렇듯 새마을지도자
13년 동안 교동리 이장직을 맡아왔고 지난 2년간은 당진읍이장단협의회장직을 맡았다. 임기를 올해로 마치고 이제 물러나 있다. 이 자리를 빌어 나를 도와준 많은 지인들과 마을 임원들에게 고마운 말을 전한다.내가 이장으로 재직하면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몇 달전 교동리가 1~3리로 분구된 것을 나의 작은 보람으로 꼽고 싶다. 물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분구를 했다. 교동리는 급격히 개발되는 지역으로 대단위 아파트들도 속속 들어서고 지역도 무척 넓어 분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었다. 지금은 교동2리 이장이 최경용씨, 3리는
어린 시절 나에게 꿈은 육상이었고 육상특기생으로 호서중학교에 진학했다. 이후에는 4H회였다. 내 삶에 새겨진 추억들은 먼 훗날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다. 첫 번째 사진은 고산초등학교에 다닐 때 육상부 선수들과 찍은 사진이다. 워낙 오래된 사진이라 기억이 잘 안난다.(웃음) 초등학생이었을 때니 1968년 정도인 듯하다. 장소는 장고항 앞
한진 어촌계장직만 16년 동안 맡아온 것을 비롯해 20여년을 바다에서 봉사해왔다. 덕분에 아내(차기자, 55)에게는 좋은 남편이 되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든다. 첫 번째 사진은 1972년 베트남으로 파병됐을 때 작전 시작을 앞두고 종군기자들이 찍어준 사진이다. 백마부대 소속이었던 나는 베트남에서의 잇따른 대규모 병력 피해로 인해 추가차출돼 파병
집에 있는 옛 사진들을 찾아보다 발견한 내 소중한 추억들이다. 나와 갓 결혼한 아내의 모습, 두 딸의 어릴 적 모습... 사진들을 찾아보며 오랜만에 흐뭇해졌다.첫 번째 사진은 당진상고(현 당진정보고) 재학 중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사진이다. 올해 내가 54세이니 38년 전 사진이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나. 내 오른쪽 친구가 서진산업에서 일했던 김용권이다.두 번째 사진은 갓 결혼한 아내(이경숙, 50)의 모습이다. 천안에서 직장을 다닐 때 아내를 만났는데 아내의 저 당시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사내에서도 인기가 높은
이제 1년 반 후면 40여년 동안의 교직생활을 마치게 된다. 옛 사진들을 찾아보며 그동안의 교직생활과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의 모습 등을 다시 떠올렸다. 교직 생활을 마치면 자연인으로 돌아가 여유를 즐기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첫 번째 사진은 1970년쯤일 것인데 옆 친구(우)는 최영수 현 당진농협 조합장이다. 최영수 조합장은 원당삼거리의 이웃집에 살았고 지금까지 나와 절친하게 지내는 친구다. 계성초부터 당진중, 당진상고(현 당진정보고)를 함께 다녔다.두 번째 사진은 1973년 공주교대를 졸업하면서 찍은 기념사진. 이 사
9년 동안 맡아온 바르게살기운동 면천면위원장직을 사무총장이었던 최경선씨에게 넘겨주었다. 비록 당진군위원회 부위원장을 이어 맡았지만 그동안 활동해오며 겪은 일들을 생각하니 뿌듯하면서 한편으론 아쉽기도 하다.첫 번째 사진은 아내(이순세, 62)와 큰아들(중규, 35)의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찍은 사진이다. 벌써 25년도 더 된 사진 같다. 뒤에 있는 배경은 면천국민학교(현 면천초등학교)와 면천면사무소를 나누는 벽이다. 당시 논에서 일하다 곧바로 학교로 갔더니 얼굴이 조금 피곤해보인다. 당시 저렇게 작은 꼬마였던 큰 아들은 지금은 경찰관이
옛 사진을 신문에 싣고 싶다는 요청을 받고 한동안 앨범을 찾다가 잠시 옛 생각에 젖었다. 아내와 아이들, 살고 있는 집, 학창시절 등... 지금 돌이켜보면 내 삶은 나름대로 성공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첫 번째 사진은 1968년에 찍은 사진. 이 사진은 사연이 있다. 둘째 형님(병준, 65)이 월남으로 파병됐을 때 가족들이 보고싶다며 사진을 보내달라고 해서 찍은 사진이다. 월남에 간 장병들은 그곳에서 받은 돈을 고국으로 보냈었는데 옆에 있는 소가 그 돈으로 산 소다. 형님이 애써서 모은 돈으로 산 소를 보여주고 싶어 사진을 함께 찍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