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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4주년 특집 특별기고 1] 당진 3.1운동의 시발점 - 서울 3.1운동에 참여한 당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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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919년 3월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의 함성은 들불과 같이 전국으로 번졌다. 그 결과 3월 10일부터 4월 13일의 한 달여 기간 동안 당진 전 지역에서도 독립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1운동 104주년을 맞이하여 당진지역 독립 만세운동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고자 김남석 호서고 역사교사의 글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글 싣는 순서>

1. 당진 3.1운동의 시발점  - 서울 3.1운동에 참여한 당진인들

2. 당진인의 문중의식과 독립정신

3. 당진 3.1운동의 유산- 화합과 통합의 정신

4. 당진 3.1운동은 최초 혹은 최대의 독립 만세운동

애국지사 고희준의 묘(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묘비번호 806)
애국지사 고희준의 묘(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묘비번호 806)

당진 3.1운동의 직접적인 배경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고 귀향한 분들에 의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서울 3.1운동을 직접 주도한 분들에 의해서다. 전자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1919년 2월말, 대호지면 도호의숙 유생인 남주원, 남계창, 남상돈, 남상락, 이대하 등은 고종의 장례식이 3월 3일에 열림을 알고 서울에 올라갔다. 

이들은 그 전전날인 3월 1일부터 일어난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였고, 대한문에서 거행된 장례행렬에 참례한 직후 서둘러 귀향하였다. 이때 습득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인천의 일본인 백화점에서 구입한 램프에 숨겨 들여왔다. 이 일은 대호지 3.1운동의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고, 램프가 독립기념관에 기증됨으로써 모든 정황이 사실로 인정받았다.

면천공립보통학교의 원용하, 원용은 형제도 고종의 장례식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다. 원용은이 현재의 초등학교 4학년이었지만, 1902년생으로 당시 18세였음을 고려하면 충분히 상경할 나이였다(실제는 더 많았다고 함). 특히 아버지 원형상이 대한제국 군인인 정3품 육군 정위를 지냈기에, 나라에 대한 충절의식은 더욱 강했을 것이다. 더욱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고 나라가 식민지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컸을 것이다. 원용은도 서울의 3,1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하면서 독립 만세운동을 구체화해 나갔다.

다른 하나는 서울 3.1운동에 직접 참여한 분들의 사례다. 강선필, 박쾌인, 고희준이 그들이다. 강선필(1898~1976)은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면천초등학교 4회 졸업생으로 전교 1등을 하였다. 원용은과 함께 순성면 성북리에 살았는데, 인근 주민에게 최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200여 명의 학생과 함께 탑골공원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고종의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한 아버지와 함께 3월 7일 귀향했다. 원용은이 불렀다는 ‘독립의 노래’는 강선필이 제공한 유인물에서 나온 것이었다. 강선필은 학생만세운동이 일어났던 3월 10일경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의 독립운동은 면천만세운동의 결정적인 배경이 됐다.

박쾌인의 수형기록카드(출처:국사편찬위원회). 그는 1920년 2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쾌인의 수형기록카드(출처:국사편찬위원회). 그는 1920년 2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쾌인(1898~1950)도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당진 읍내리 출신으로 당진초등학교 졸업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그리고 3월 5일 급거 상경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귀향했다. 그는 당진경찰서의 감시 속에 지내다가 4월 2일경, 체포됐다. 만세운동은 3월 10일과 16일 당진 읍내에서도 일어났다. 비록 사전에 억압당했지만, 박쾌인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희준(1897~1951)은 면천면 자개리 출신으로 당시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다. 역시 3월 1일 탑골공원에 뒤이어 광화문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군중의 맨 앞에서 시위를 전개했는데, 흰 수건을 흔들면서 군중을 이끌었다고 한다. 만세운동 직후,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같이 당진의 3.1운동은 학생과 유생이 스스로 계획하고 추진한 주체적인 만세운동이었다. 운동은 치밀했고, 항일의식은 강렬하며 견고했다. 후일 박쾌인의 심문 과정에서 판사가 “장래도 독립운동을 할 작정인가”라고 물었다. 이때 박쾌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운동할 작정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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