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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4주년 특집 특별기고3] 당진 3.1운동은 최초 혹은 최대의 독립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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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호서고 역사교사

 

<편집자주> 1919년 3월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의 함성은 들불과 같이 전국으로 번졌다. 그 결과 3월 10일부터 4월 13일의 한 달여 기간 동안 당진 전 지역에서도 독립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1운동 104주년을 맞이하여 당진지역 독립 만세운동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고자 김남석 호서고 역사교사의 글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글 싣는 순서>

1. 당진 3.1운동의 시발점 

    - 서울 3.1운동에 참여한 당진인들

2. 당진인의 문중의식과 독립정신

3. 당진 3.1운동은 최초 혹은 최대의 독립 만세운동

4. 당진 3.1운동의 유산- 화합과 통합의 정신

 

이인정의 수형기록카드(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직업: 면장, 신분: 양반, 본적: 서산군(현 당진시) 대호지면 사성리, 죄명: 보안법 위반, 형기: 징역 1년, 언도관서: 경성복심법원, 출소연월일: 대정 9년(1920년) 12월 24일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이인정의 수형기록카드(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직업: 면장, 신분: 양반, 본적: 서산군(현 당진시) 대호지면 사성리, 죄명: 보안법 위반, 형기: 징역 1년, 언도관서: 경성복심법원, 출소연월일: 대정 9년(1920년) 12월 24일 (※출처:국사편찬위원회)

한때 ‘최초’, ‘최대’라는 용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갈망하던 사람들이 일반인의 평균적인 능력치 이상을 요구하고자 독려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단어는 보편성과 다양성을 수긍하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의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데도 적절히 활용되었다. ‘최초’, ‘최대’는 우리나라를 뛰어넘어 세계로 확대되었다. ‘세계 처음’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흥분시켰고, 생각을 하나로 모이게 하였으며, 힘을 배가시킬 수 있었다. 비교적 먹고살기 힘들었을 때의 이야기다.

고단했던 시기에 열광했던 단어를 오늘에 소환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살림살이가 나아져 생각의 깊이와 여유는 늘어났지만, 당진 3.1운동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아직도 저조한 단계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당진 3.1운동에 대한 추념은 일회성에 한정되고, 지속적으로 설명하는 공간이 아직도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이 이유다. 경기도 안성 3.1운동 기념관이 개관한 지 20년이 지났고, 제암리 3.1운동 기념관은 개관 30년을 기념하여 화성시 독립운동기념관으로 새롭게 거듭난다고 소개하고 있다. 공주시 독립운동 기념관이 올해 3.1절을 기하여 개관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아직도 고단한 시기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최초’라는 수식어는 당진 3.1운동의 어느 즈음에 해당할까? 바로 면천 3.10학생만세운동이다. 이 만세운동은 보통학교 학생의 만세운동 가운데 충남 최초였다. 애당초 서울 3.1운동은 현재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였다. 현재 대학교인 전문학교 학생이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공립보통학교(이하 공보교)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3.1운동이 지방으로 확산하면서 각지의 공보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면 만세운동에 선천공보교 학생들이 참여하였고, 3월 5일에는 평양공보교, 함흥공보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7일에는 경기도 시흥공보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3월 10일 강원도 철원공보교, 경기도 파주의 교하공보교, 전북 임실의 오수공보교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당진의 면천공보교에서도 3월 10일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뒤를 이어 3월 12일 온양공보교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면천 3.10학생만세운동이 ‘충남 최초’라고 한다.

대호지 천의장터 4.4 독립만세운동에서도 ‘최초’가 있을까? 우선 남주원을 위시한 유림과 이인정 면장이 참여한 점에서, ‘민관 합동’이라는 특성을 찾아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많은 곳에서 확인된다. 경기 고양의 은평면장 강태식과 송포면장 이기순, 양주군 별내면장 이해원, 진위군 서탄면장 윤기선, 수원군 장안면장 김현묵, 경북 안동 예안면장 신상면, 전북 남원군 덕과면장 이석기 등이 대표적이다. 

이석기 면장의 경우, 1919년 4월 3일 식수기념일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군내 14개 면의 면장에게 격문을 보내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초가지붕에 올라가 군중을 지휘하였다. 만세운동 이후 남원에서는 면장 6명과 면서기 7명이 사직원을 냈다. 덕과면의 만세운동은 대호지면과 매우 흡사하다. 주목되는 점은 이인정 면장의 연세다. 이분은 1859년생으로 당시 61세였다. 환갑의 연세에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더욱이 환갑을 맞이한 면장이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례는 ‘최초’로 추정된다.

‘특별한 점’과 ‘최대’를 적용할 수도 있겠다. 우선, 4.4 만세운동이 면장→면서기→소사→구장으로 이어지는 행정 라인을 가동한 가장 전형적인 만세운동이었다고 평가되는데 이것은 ‘특별한 점’이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사항이 있다. 4.4 만세운동으로 인한 피해자 199명 가운데 대통령표창 이상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분이 2023년 3월 현재 156분(애국장 3분, 애족장 39분, 건국포장 1분, 대통령표창 113분)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충남에서 가장 많은 유공자 서훈을 받은 지자체는 청양(230여 분), 홍성(220여 분), 당진(186분) 등이다. 당진의 독립유공자는 거의 대호지지역 분들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면 단위로 한정하면 전국 ‘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독립운동이라는 업적을 남긴 분들을 ‘단순 수치’로 비교함은 매우 적절치 못한 것이지만, 당진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는 취지에서 더할 수 없는 자료라 하겠다. 기념관 설립과 함께 만세운동의 선양, ‘최초’, ‘최대’의 수식어를 소환한 같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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