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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담도에도 사람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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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고속도로의 백미’ 서해대교 건설하며 고향 잃은 주민들
개발 과정서 대기업과 정부 기관 상대로 투쟁…농성·폭행·구속까지
“주민 흔적 전혀 없어…휴게소 한편에 ‘행담도 역사관’ 건립되길”

지난 18일 행담도 사람들로 구성된 행담향후회가 창립했다. 이들이 행담도를 떠난지 20년만이다.
지난 18일 행담도 사람들로 구성된 행담향후회가 창립했다. 이들이 행담도를 떠난지 20년만이다.

행담도에도 사람이 살았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지나는 사람들에겐 잠시 들리는 휴게소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이곳에 사는 주민들이 있었다. 행담도 개발로 모두 고향을 잃고 전국 각지로 흩어져 살던 주민들이 20여 년 만에 모였다. 

지난 18일 삽교호관광지 수산물시장에 위치한 작은 횟집이 설렘으로 가득 찼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서로 손 내밀며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싸안고 기뻐하는 사람들로 하나 둘 자리가 채워졌다. 횟집 한쪽 벽면에 ‘행담향우회 창립총회’라고 적힌 현수막이 붙었지만, 여느 행사처럼 특별한 식순이나 형식은 없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 옛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모임이 진행됐다. 

서해안 발전의 상징이자 아픔 

당진과 평택 사이 아산만에 위치한 행담도는 7만 평 남짓에 불과했던 작은 섬으로, 서해안 발전의 상징적인 곳이다. 1990년대 서해안고속도로가 추진되면서 넓고도 깊은 아산만을 건너는 7310m 길이의 서해대교가 건설됐다. 지난 2000년 개통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로 ‘서해안고속도로의 백미’라고 불리는 서해대교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 중간에 행담도가 없었다면 6700억 원이 들었던 서해대교 건축비는 천문학적으로 올라갔을 것이고, 공사 또한 상당히 지연됐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행담도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1990년대 말까지 이곳엔 주민 20여 명이 살았고, 행담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육지로 내몰릴 위기에 처하면서 행담도 개발 과정에서 끝까지 저항했다. 1997년부터 서해대교 개통까지 당시 당진시대에 보도된 다수의 기사에 따르면 한국도로공사와 LG건설이 교량 건설을 위해 세운 레미콘공장 운영 등 행담도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은 분진을 비롯한 환경피해에 고스란히 노출됐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이주·생계대책이 마련되지 않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함을 호소했다. 

고작 10여 명의 주민들이 계란으로 바위 치듯 거대 기업과 정부 기관, 그리고 주민들의 고통을 수수방관하던 당진군에 맞서 싸워야 했다. 공사 현장 관계자들이 욕설과 폭언을 하고, 주민들에게 물을 끼얹으며 폭행했고, 심지어 공사현장에서 사용하는 칼을 들이대면서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서도 주민들은 농성을 하며 현장에서 뒹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몇몇 주민들은 공무방해 혐의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끝끝내 주민들은 행담도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이곳에 지난 2001년 1월 행담도 휴게소가 개장했고, 2015년에는 모다아울렛이 조성됐다. 주민들이 다 떠난 행담도. 이곳을 이용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은 과거 행담도의 아픔은 알지 못한다. 

‘가치내’라고 불리던 섬 

본래 행담도는 주민들에게 ‘가치내’라고 불렸다. 섬에 갇히면 나오지 못한다는 뜻이란다. 이에 대한 기록은 송악 부곡리에서 소설 <상록수>를 집필한 심훈 선생이 쓴 수필 <7월의 바다>에도 기록돼 있다. 

“흰 구름이 벽공에다 만물상을 초 잡는 그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맥파만경에 굼실거리는 청청한 들판을 내려다보아도 백주의 우울을 참기 어려운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조그만 범선 한 척을 바다 위에 띄웠다. 붉은 돛을 달고 바다 한복판까지 와서는 노도 젓지 않고 키도 잡지 않았다. 다만 바람에 맡겨 떠내려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는 뱃전에 턱을 괴고 앉아서 부유와 같은 인생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중략) 배는 아산만 한가운데에 떠 있는 ‘가치내’라는 조그만 섬에 와 닿았다. 멀리서 보면 송아지가 누운 것만한 절해의 고도다. 나는 굴 껍데기가 닥지닥지 달라붙은 바위를 짚고 내렸다. 조수가 다녀나간 자취가 뚜렷한 백사장에는 새우를 말리느라고 공석을 서너 잎이나 깔아 놓았다. 꼴뚜기와 밴댕이 같은 조그만 생선이 섞인 것을 해쳐 보려니,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 심훈 <7월의 바다> 중

이 수필에 따르면 심훈은 가치내, 즉 행담도에 우연히 들리게 된 이후 1년 뒤 이곳을 다시 찾는다. 이 ‘외로운 섬’에서 만난 노파와 아낙을 만난 이야기가 글에 담겨 있다. 

여전히 눈에 선한 고향의 모습

이익주(63·경기도 일산 거주) 씨에 따르면 한때 행담도에는 13가구, 63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한다. 이 씨는 “가끔 차를 타고 이곳을 지날 때면 고향이 그리워 울기도 한다”며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많은데, 더 늦기 전에 이 모임을 꼭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개발이 되기 전, 행담도 주민들은 굴 따고, 바지락 캐고, 물고기를 잡아 생활했다. 어린 아이들은 ‘동녁곱’이라고 부른 언덕을 오르내리며 칡뿌리 캐먹고 뱀과 지네를 잡으며 놀이와 생계를 함께 이어갔다. 섬에 있는 학교라고는 한정초등학교 행담분교 뿐이었다. 

손순식(62·경기도 평택 거주) 씨는 “어렸을 땐 그 언덕이 그렇게 높고 웅장해 보였다”며 “섬 서쪽은 완만한 반면 동쪽은 가파르면서 돌이 많았고, 남쪽과 북쪽으로는 모래톱이 있어 친구들과 수영을 하며 놀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언덕 꼭대기에 제사를 지냈던 느티나무 서낭당이 있었다”면서 “여름 행락철에는 외부에서 사람들이 많이 놀러왔는데, 한철 장사만 하는 임시유원지와 매점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87세 노인의 행담분교 이야기 

행담분교에서 두 차례, 총 4년을 근무한 김명중(87·대전 거주) 전 교사도 이날 자리에 함께 했다. 행담도를 떠난 뒤 38년만에 주민들을 만난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70년 3월부터 1972년 2월까지 근무한 뒤, 1983년 3월부터 1985년 2월까지 이곳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두 번째 행담도에 들어오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이었다. 기온이 영하 25℃까지 떨어지면서 바닷물이 얼어 유빙이 생길 정도였다. 썰물 때 얼음조각이 갈라진 틈을 타 얇은 베니아판(합판)으로 만든 조각배를 타고 행담도로 들어가던 중 바다 가운데에 고립되고 말았다. 점점 물이 들어오면서 유빙이 떠밀려 오고 자칫 배가 얼음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쉽게 부서져 침몰할 상황이었다. 함께 배를 탄 학생·주민들과 웃옷을 벗어 살려달라고 손짓하면서 소리를 질렀고, 섬 안에 있던 경찰이 이들을 보고 신고해 당시 충남도에 처음으로 도입됐던 헬기가 와서 구출했다는 것이다. 

김명중 전 교사는 “정이 넘쳤고 주민들이 모두 가족같이 지내 섬에서 사는 동안 전혀 외롭지 않았다”며 “행담분교를 떠난 이후에도 평생 이곳에서의 교직 생활을 잊지 못했다”고 말했다. 

“행담도 휴게소 가지 못해”

이곳에서 살아온 주민 개개인의 역사는 지역의 역사이기도 하다. 20여 년 만에 모인 행담향우회 주민들은 최근 행담도 휴게소 귀퉁이에 작은 ‘행담도 역사관’을 건립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7일 한국도로공사에 민원을 접수했으나 한국도로공사 측에서는 “행담도는 민간기업에서 공사비를 부담해 건설하고 운영 중인 휴게소”라며 “역사관 건립은 한국도로공사가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주민들은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전국 각지에 행담도 출신 주민들이 살고 있지만, 꿈에서도 고향을 잊을 수 없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들리는 행담도 휴게소에 정작 이곳 출신인 주민들은 상처로 남은 기억 때문에 행담도 휴게소에 가지 못한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휴게소 뒤편에 서해대교 건설 당시 약력이 기록돼 있지만, 행담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면서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의 소박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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