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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23.04.05 10:53
  • 수정 2023.04.06 16:47
  • 호수 1449

[문화칼럼]
최규범   전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 회장
104주년을 맞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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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후략)” 

이것은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첫 문장이다. 헌법 전문을 통해 대한민국의 근본이 3.1운동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한 대통령은 우리가 국제 정세에 대처하지 못한 무능으로 일제 침략을 당했다는 식의 침략자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으로 3.1운동정신을 훼손시켜 논란이 됐다. 

여기에 충북도지사는 “기꺼이 친일파가 되겠다”고 자처하고 나서는가 하면, 급기야 직업이 목사라는 세종시의 한 시민은 일장기를 버젓이 내걸었다. 이는 다름 아닌 3.1절에,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렇듯 외세 침략에 맞서 거국적으로 맞서 만천하에 떨친 선조들의 독립 의지와 숭고한 뜻을 이처럼 폄훼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단 말인가?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우리나라 현대사를 들여다보면 이는 크게 놀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해방 후 통일정부를 세우려던 민족주의자들은 남과 북에서 모두 그 힘을 잃고 암살되거나 숙청되었다. 북한에서는 소련이 앞세운 김일성이, 남한에서는 미군정과 손잡은 이승만이 각기 분단된 정권을 세우고 치안을 구실로 일제에 협력한 관료들을 모두 기용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일제에 협력한 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국회에서 설립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법으로 정하였지만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지지부진 하다가 이승만의 지시로 1949년 6월 6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일제에 부역한 자를 단 한 명도 단죄하지 못했으며, 경찰은 물론 군부, 정계, 재계, 학계, 심지어 문화예술계까지 ‘천황폐하’를 외치던 자들의 세상이 된 것이다. 

이처럼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상태에 있다가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기습남침했고, 3년간의 전쟁 끝에 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분단이 고착화됐다. 이로써 친일파는 다시 반공주의자로 이름을 바꿔 이 사회에서 입지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6.25전란으로 독립운동가 후손이 자원입대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출신의 면접관이 “네가 독립군 출신의 자손 나부랭이냐”고 물었다는 비사가 있을 정도로 친일파의 위세는 해방 후 80년이 가까워 오도록 대한민국의 상층부를 형성해 일제 청산의 기회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지 아니한가. 

그래도 그간에는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어서인지 친일 행적을 드러내길 꺼려했는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것마저도 망각한 채, 국익 또는 경제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저들의 반성 없는 선진우호 관계를 주장한다면, 구한말 저들에게 주권을 내주었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다가 독도는 일본 영토이고 유사시 일본자위대가 한국땅에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부 관료가 나오는 건 아닐지 심히 우려스럽다. 

4월 4일이면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인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 104주년 기념식 및 만세재현행사가 대호지 창의사와 정미 천의장터에서 열린다. 1919년 3월 1일 고종 인산날에 참석해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한 대호지 유생들과, 대호지면장 이하 면사무소 직원들은 천의장터가 열리는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도모했다. 1919년 4월 4일, 도로 보수를 구실로 대호지면사무소 광장에 4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이들은 도로 보수가 아닌 만세운동임을 천명하고, 독립선언서 낭독과 자체 제작한 애국가 제창, 그리고 공약삼장을 발표하는 등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과 행동으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천의장터까지 이어진 만세운동은 1000여 명이 합세하면서 이를 저지하려던 왜경주재소를 파괴하고 일본 순사를 무장해제 시키는 등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였다. 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이 일본 육군대신 앞으로 4월 4일부터 4월 19일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만세운동의 상황을 보고한 전통문에 천의장터 만세운동이 4~5차례 언급될 정도로 가열찬 만세운동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참담했다. 현장에서 한 분이 학살당했고,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하신 분이 세 분이요, 옥고를 치르신 분이 200여 분에 이른다. 또한 고문 후유증으로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 가신 지역의 선열들이 얼마인지 일일이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리하여 지난 1991년 당시 당진군에서 창의사를 짓고 603위의 애국지사 위패를 모셨으며,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매년 4월 3일과 4일 이틀에 걸쳐 추모제와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하지만 창의사가 협소해 위상에 걸맞는 공간과 환경이 필요하다는 그간의 끊임없는 요구로 현재 확장 이전 작업을 진행 중이다. 창의사 확장 이전은 물론 기념관 설립과 역사공원을 조성해 많은 사람이 선열들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고 희생정신을 본받을 수 있는 학습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어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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