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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읍면소식
  • 입력 2023.05.26 22:14
  • 수정 2023.07.04 17:37
  • 호수 1457

[우리마을 이야기 1] 송악읍 봉교리 / 봉학이 앉았다 간 아름다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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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아다리·봉아재·먼재·섭실·정착지·산죽말 등 자연부락 
떡시루 놓고 아들 낳게 해달라고 빌었던 삼형제바위
76년 전 만든 푸른 용 그려진 용대기 주민이 보관 중

 

<편집자주> 당진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마을의 모습 또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미 없어진 마을이나 없어질 위기에 처한 마을, 또한 자연마을 중에서도 농촌 고령화로 인해 전통의 맥이 끊길 상황에 놓인 마을 등 기록해두지 않으면 금세 잊혀질지도 모르는 마을들이 존재한다. 마을의 전설과 옛 지명, 보호수를 비롯한 자연화경, 열녀문·효자비 등 다양한 마을의 이야기와 마을이 가진 자원을 발굴함으로써 지역주민들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마을의 이야기를 신문 지면과 유튜브 영상을 통해 기록한다. 

※이 기사는 2023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취재·보도합니다. 기사 내용은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송악읍 봉교리 주민들
송악읍 봉교리 주민들

봉학이 앉았다 갔다는 마을 지명의 유래처럼 송악읍 봉교리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봉교리 주요 농업 중 하나가 감자인 만큼 요즘 봉교리 일대는 너른 감자밭이 푸르름을 뽐내고 있다. 오봉제를 끼고 있는 봉교리는 송악읍 광명리와 청금리, 본당리, 신평면 거산리와 인접해 있다. 북동쪽으로는 야트막한 구릉으로 이뤄져 있고, 남서쪽 오봉천 주변에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주민들은 “당진에서 철탑 없는 동네”라며 아늑하고 아름다운 마을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봉치리 + 저교리 = 봉교리 

본래 면천군 손동면 봉치리와 저교리, 선치리로 나뉘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세 마을의 일부가 병합되면서 봉치리와 저교리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 ‘봉교리’가 됐다. 

봉교리에는 △방아다리 △봉아재 △먼재 △섭실 △정착지 △산죽말 등 6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방아다리는 봉교리 동쪽 신평면 거산리와의 경계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에 맷돌방앗간이 있었다 해서 방아다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이밖에 부락 지형이 디딜방아 형태를 닮아 ‘방아다리’, ‘방아머리’라는 유래도 있다. 

봉아재는 봉학재, 봉학티, 봉치라고도 불린다. 봉교리 한복판에 있는 마을로 봉치산이 있으며, ‘새가 나는 형국’, ‘봉학이 앉은 자리’, ‘봉학이 알을 품는 지형’ 등 지명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먼재는 방아다리 서쪽 먼재고개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뒷산이 다른 산보다 더 나와 있다고 한다. 섭실은 봉아재 서쪽 골짜기에 있는데, 예전에 섶이 많았다고 한다. 신골 또는 신곡 등으로도 불린다. 정착지는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정착해 배급을 받아 생활하면서 땅을 개간해 형성된 마을이며, 산죽말은 옛날에 산골 진펄로 쓸모없는 곳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봉교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지만 봉교리로 전입한 귀농·귀촌인이 많아 현재 150여 가구에 2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구자산 이장은 “새로 전입한 주민들과 소통이 많지 않아 안타깝다”며 “이주한 주민들이 마을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단기 4280년(1947년)에 제작한 농기. 용대기라고도 부른다.
단기 4280년(1947년)에 제작한 농기. 용대기라고도 부른다.

76년 된 용대기와 다시 살린 보호수 

한때 민속보존마을로 불렸던 봉교리에는 농악보존회가 운영되기도 했다. 지금은 고령화로 더 이상 농악보존회가 운영되지 않지만, 봉교리 농악대가 활발히 활동했던 당시만해도 기지시줄다리기 축제에서 상쇄 역할을 도맡을 정도였다. 축제가 열리면 봉교리 주민들은 용대기(龍大旗)라고 부르는 농기를 들고 농악대를 앞세워 줄다리기에 참여했다. 

푸른 빛의 용이 힘차게 구름을 타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이 용대기는 단기 4280년(1947년) 6월에 제작했다고 쓰여 있다. 무려 76년이나 된 마을의 보물이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대호지면 적서리 용대기 못지않다. 현재 이 용대기는 한 주민이 종이상자에 담아 나름대로 잘 보관하고 있으나, 전문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이은권 고문은 “기지시줄다리기를 하면 용대기를 앞세우고 봉교리 농악대가 농악을 치며 상쇄 역할을 했다”며 “공주·부여 등에서 열린 백제문화제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5반엔 1998년 보호수로 지정된 산돌배나무가 있다. 그러나 2009년 2월 해제됐다. 당진시 산림녹지과 담당자는 “당진시 보호수 대장에 따르면 봉교리 산돌배나무가 고사하면서 2009년에 보호수가 해제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나무는 아직도 잘 살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산돌배나무 인근에 사는 주민은 “다 죽어가는 나무를 내가 겨우겨우 살려놨다”고 말했다. 

1998년 보호수로 지정됐다가 2009년 지정이 해제된 봉교리 산돌배나무
1998년 보호수로 지정됐다가 2009년 지정이 해제된 봉교리 산돌배나무

지금은 없어진 삼형제바위와 서낭나무

봉교리에는 ‘삼형제바위’도 있었다. 지금은 다 사라졌지만, 3개의 큰 바위가 마을에 있었는데, 주민들은 시루떡을 해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곤 했다. 이은권 고문은 “삼형제바위 앞에 떡시루 놓고 옛 어른들이 기도했다”며 “아들 낳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고 말했다. 이밖에 서낭도 있었는데 새마을운동 당시 마을길을 내면서없애 버렸다고 한다. 당시엔 서낭나무를 잘못 건드리면 해를 입는다고 해서 교회 사람들을 불러다가 나무를 베었다는 얘기도 전해내려 온다.   

한편 봉교리 주민들은 봄엔 감자를, 가을엔 무·배추를 주로 재배하고 있다. 주로 밭농사를 위주로 하지만, 일부 벼농사도 이뤄진다. 구자산 이장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던 당시에 동네 주민들이 길을 냈다”며 “그 길을 지금껏 쓰고 있는데 농기계와 차량이 대형화되면서 마을길이 너무 좁아 확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봉교리 마을회관 옥상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봉교리 마을회관 옥상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봉교리 마을회관의 모습
봉교리 마을회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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