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실시간뉴스
편집 : 2024-04-26 19:24 (금)

본문영역

  • 칼럼
  • 입력 2023.06.02 21:08
  • 수정 2023.06.02 21:10
  • 호수 1458

[시론] 100년 역사, 행담도에는 왜 휴게소만 있을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규상 오마이뉴스 대전충남본부장

“그 날은 바다 위에 일점풍도 없 었다. 성자의 임종과 같이 수평선  너머로 고요히 넘어가는 태양을 바 라보며, 나는 석조에 타는 붉은 물결을 머리 보며 느꼈다. 이 외로운  섬 속,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속에  서도 우리의 조그만 생명이 자라나고 있지 않은가?  그 어린 생명이 교목과 상록수와 같이 장성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이 쓸쓸한 우리의  등 뒤가 든든해지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는가!”(1935, 심훈의 수필 '칠월의 바다' 중에서)

소설 <상록수>를 집필한 심훈은  서른 여섯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상록수를 집필하던 1935년 그해 여름, 심훈은 당진 앞바다인 ‘가치내’를 방문하고 느낀 소회를 수필 <칠  월의 바다>에 수록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한번 들어가면 갇힌다’고  해서 ‘가치내’라고 불렸다고 한다.

심훈은 식민지 치하에서 모진 시  대풍파에 시달리는 노파의 고단한  삶 속에서 ‘가치내’에서 잘 자라고있는 ‘어린아이’를 보며 희망과 해  방의 미래를 내다봤다. 심훈은 ‘상록수’처럼 푸르른 조국의 모습을  88년 전 ‘가치내 사람들’에서 미리  보았다.

수필 속 ‘가치내’가 서해대교가  지나다 만나는 지금의 행담도다. 행  담도는 지난 2000년 당시 우리나  라에서 가장 긴 다리인 서해대교  개통과 함께 행담도휴게소가 들어  섰고, 이름 그대로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行) 행담도(行淡島)가 됐다.  가치내에서 행담도로의 변신은 극 과 극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행담도 사람들’ 또한 극 과 극으로 다가온다. 하루종일 불이 꺼지지 않는 행담도에 정작 행담도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살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심훈의 수필 속 ‘어린아이’ 등  한 때 수십 가구 100여 명이 살았던 원주민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행담도는 원주민들에게 진주같  은 섬이었다. 갯벌에서는 굴과 바지락이 쏟아져 나왔다. 낙지, 소라, 박하지 등이 지천이었다. 굴과 바지락  은 행담분교를 졸업하고객지로 나  간 아이들의 학비와 유학생활을 가  능하게 한 살림의 원천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당산에 올라 멀리 아산  만을 내려다 보며 섬 생활의 시름과 답답함을 날렸다.

그들에게 서해대교와 행담도 휴게소는 일제강점기 문전옥답과 조상묘를 파헤치고 굉음을 내고 달리  던 칙칙폭폭 기차와 같은 존재였다.  1908년 1월 11일 <대한매일신보>는 경부선철도가 몰고 온 근대화  로 전국을 떠돌며 유리걸식하고 있는 민중들의 참혹한 상활을 전하고  있다. ‘저 농부가 삽을 메고 원하나니  시국이라 군용철도 부역하니 땅 바  치고 종 되었네. 일년 농사 실업하  고 유리개걸(流離丐乞,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상황) 눈물이라.’

한국민에게 철도는 양날의 칼이  었다. 근대의 새벽을 열어 발전된  세상을 열어 주는 길이기도 했고,  식민지 민중의 재산과 몸까지 바치  는 수탈의 길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행담도에는 종합휴게시설  이 갖춰져 전국 고속도로휴게소 중  매출액 1~2위를 다투는 휴게명소  가 됐다. 하지만 행담도 주민들에게  서해대교는 철도와 같은 폭력과 수  탈의 상징물이었다.

어느 날 행담도를 한복판을 동  서로 쭉 가르며 서해대교가 지났다. 당시 도로공사와 시공업체는 원  주민들을 사실상 무일푼으로 내쫓  겼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싸우던  주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공사업체  관계자들의 욕설과 폭언, 위협이었다. 행담도휴게소는 행담도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깡그리 지워버렸다.

미루나무 고목, 행담분교, 우물, 부모 묘지…. 심지어 갯벌까지 매립돼  사라졌다. 그렇게 행담도 사람들은 삶의 터전, 고향을 잃고 전국으로 흩어졌다. 불과 20여 년 전 대한  민국 충남 당진시 신평면 행담도의  개발방식은 일제강점기 시절 개발 때를 보는 것처럼 폭력적이었다.

지난 3월, 행담도 사람들 수십여  명이 20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쏟아낸 행담도에 대한 기억  과 바람은 애절하기까지 했다.

“지금도 행담도에 대한 꿈을 꿉  니다. 자다가 일어나 사무치게 그리  워 눈물을 쏟아냅니다.”

“가축처럼 내몰려 쫓겨난 상처  가 떠올라 행담도휴게소에 갈 수가  없더군요.”

행담도 원주민들이 바람은 한가  지다. 행담도휴게소 귀퉁이에 작은  '행담도 역사관'을 건립해 달라는  요구다. 행담도에 적어도 100여년  가까이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남  겨달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행담도의 새 주인인 한국도로공사는 20여 년째 묵묵부답이다. 행담도 원주민들이 자랑스럽게 기억을 반추하며 행담도를 찾을 수 있게 미루나무 고목과 당산에 올라 내려다본 가슴 설레던 아산만 낙조를 떠올릴 수 있는 ‘행담도휴게소  귀퉁이 작은 행담도 역사관’은 정말 할 수 없는 일일까?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