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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 입력 2023.07.28 18:47
  • 수정 2023.08.09 09:30
  • 호수 1466

가장 오래된 석장승‘운정리 석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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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관 민속연구가, 저서 <장승탐구>에 언급
“신평돌미륵 아닌‘운정리 석장승’으로 불러야”
“국가 문화재급…가치 재조명 및 보존 필요”

신평돌미륵(운정리 석장승)의 모습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신평돌미륵(운정리 석장승)의 모습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장승과 돌하르방에 대해 연구하는 민속연구가 김동관 씨가 최근 저서 <장승탐구>를 출간한 가운데, 운정리 석장승(신평돌미륵)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제시됐다. 저자는 “운정리 석장승은 기록이 있는 석장승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가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평돌미륵’으로 불리는 해당 유물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지난 1997년 당진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됐다. 이는 마을을 수호하고 주민의 안녕을 기원하며 세운 민간신앙의 유적으로 남근석(男根石)의 형태를 띄고 있다. 높이는 217cm, 두께는 70cm 안팎이며 이중 얼굴의 높이는 92cm이다. 

오랫동안 장승을 연구해온 김동관 민속연구가는 현재 신평돌미륵으로 불리고 있는 해당 유물을 ‘운정리 석장승’이라고 명칭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불상이 아닌 장승이라는 것이다. 김 민속연구가는 “운정리 석장승은 미륵 석불의 특징인 삼도, 수인, 장식, 옷 등이 전혀 없다”며 “대신 아주 크고 많은 영기문과 여러 가닥의 긴 혀 문양을 지녔다”고 말했다. 그는 “운정리 석장승의 외부모습을 보면 실상사나 쌍계사지, 불회사 등에 있는 많은 석장승과 공통적인 특징을 지닌 우리나라 고유의 석장승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했다. 

석장승 옆에 별도로 세워진 작은 돌에는 석장승을 세운 시기와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현재 마모가 심한 상태지만, 명문화돼 있어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평가돼왔다. 입석 기록에 따르면 석장승은 선덕 3년(세종 10년, 1428년)에 만들어졌다. 

김동관 민속연구가는 “세종 10년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때(세종 25년, 1443년)보다 훨씬 앞선 시기”라며 “장승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건립 연대가 알려진 장승 중 가장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장승”이라고 말했다. 이어 “조선 후기에 들어서야 석장승이 출현했다는 기존의 견해에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중대한 유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운정리 석장승을 처음 봤을 때는 평범하고 특색 없는 밋밋한 모습이었다”며 “하지만 사진을 확대하자 놀라운 것이 보였다”고 책 <장승탐구>를 통해 전했다. 그는 운정리 석장승을 통해 영기문과 여러 가닥의 혀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영기문은 장승이나 돌하르방, 복신미륵, 미륵불 등에 있는 무늬로, 대게 머리나 정수리에서 내려온 뱀꼬리를 닮은 독특한 무늬를 편의상 이르는 말이다. 이 무늬는 신성함과 초월적인 힘, 자비를 상징한다. 

김 민속연구가는 “운정리 석장승의 영기문과 혀는 고조선 시대 이전부터 있어 온 한민족의 고유한 석상 제작 방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기록에는 운정리 석장승보다 더 이른 고려시대에 사람의 얼굴을 닮은 인면형 석장승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실물이 없어 운정리 석장승이 현재 국내서 유일하게 기록이 명확한 석장승이자, 사람을 닮은 얼굴을 새긴 가장 오래된 석장승”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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